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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Leni Riefenstahl

일기님 2009. 10. 16. 00:28

어두운 세상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

레니 리펜슈탈 Leni Riefenstahl

 

 

ㅡ신화를 만들고 싶었던 천재 예술가 레니 리벤슈탈은 불행한 만남으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 평생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는 암흑의  역사속에 피어난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었다.

 

 

레니 리펜슈탈 감독은 총 일곱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십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녀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지만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여류 감독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편의 영화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되고 말았다.

  "히틀러를 위해 일한 것은 고작 7개월 뿐이었습니다.내 평생 겨우 7개월 뿐이었다고요."

  그녀의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레니 리펜슈탈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문제의 영화 <의지의 승리>는 파시스트와 히틀러를 위해 그녀의 모든 재능을 발휘한 작품이었다. <의지의 승리>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레니는 히틀러가 가장아끼는 감독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자의였던 타의였던 결과적으로 레니는 나치 홍보에 앞장선 꼴이었고,히틀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레니의 작품을 예술적인 관점에서 다시 평가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레니는 새로운 영화 발전의 선구자 였고, 예술가 특유의 강한 정신력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또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이용하여 보다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냈다. 레니의<의지의 승리>,<올림피아>는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후세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최고의 영화 감독으로 꼽히는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도 그녀의 업적을 인정했다. 중국의 한 대학 교수는 학생들에게<의지의 승리>를 보여주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학생들이 나치 주의자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입니다."

  레니와 그녀의 영화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여사 속에서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녀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남기려 했을까?

 

전쟁과 예술

 

 

  레니는 1902년 8월 22일, 베를린의 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니나를 꿈구었으나 1922년 오디션을 보던 중 다리를 크게 다쳐 꿈을 접어야 했다. 이 무렵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뒤바꾼 영화 포스터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192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독일영화<성산>의 포스터였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던 그녀는 순간 그 영화가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았다. 얼마 후 레니는 <성산>의 주인공인 루이 트랜커를 찾아가서 당당히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성산>의 감독 아놀드 팡크에게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레니의 사진을 받아본 아놀드 팡크 감독은 그녀의 당돌함이 맘에 들어 자신의 다음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레니의 영화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는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었다. 레니는 특유의 섬세함과 창조 정신을 발휘하여 각본에서 감독까지 다양한 재능을 선보였다. 초창기에는 스폰서를 찾지 못해 고전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레니는 1932년 <푸른 빛>으로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레니는 세계 영화제로부터 인정 받을 무렵 그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히틀러를 만났다. 1932년, 레니는 한 체육관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히틀러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곧 히틀러에게 편지를 썼고 , 히틀러는 훗날 자신을 위해 영화를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레니는 히틀러와의 관계를 묻는 사람에게 " 딱 한 번 해변에서 데이트를 즐긴적 있다. 하지만 그는 내 이상형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매력을 지닌 남자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훗날 그녀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히틀러는 나를 진정한 예술가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말하는 것처럼 애인 사이는 아니었다."라며 히틀러와의 관계가 깊지 않았다고 못 밖았다. 그러나 당시 레니는 히틀러의 힘을 입어 최고 영화감독 대우를 받으며 다른 영화인들이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렸다.

 

나치와 히틀러

 

  1933년, 히틀러는 레니에게 다음 해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당 대회를 테마로 영화를 찍어달라 부탁을 했다. 이 영화가 바로 문제의 영화<의지의 승리>이다. 히틀러는 이영화를 찍는 레니에게 최상의 작업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백여명 이상의 스태프 , 촬영감독 열여섯 명, 촬영감독 한 명당 조수 한 명, 카메라 36대 동시 동원, 그리고 경비는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작업 환경은 당시 영화계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덕분에 레니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최고의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엇다.

  레니는 그녀만의 독특한 연출방식으로 지루한 당 대회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최고의 영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러 각도에서 수십 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해 수많은 영상 속에서 하나를 뽑아내 영화에 활용했다.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사용된 필림이 무려4천 3백 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발레니나가 꿈이었던 레니는 오랫동안 몸으로 익힌 생동감과 속도감을 영화 촬영에 활용했다. 그래서 그녀의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을 기본으로 시각적 효과를 매우 중요시한다. <의지의 승리>는 레니의 모든 역량이 총 집합된 한 편의 환상곡이었으나, 실상은 나치의 열정에 감동한  한 여성의 감상이 담긴 영화였다. 하지만 레니는 나치주의가 아닌 그들의 열정에 감동한 것이었다. 레니의 카메라를 통해 나치주의자들의 열정은 예술적 경지로 승화 되었고, 그래서 이영화는 가장 성공한 정치 예술로 손꼽힌다. '레니 리펜슈탈의 숙명과 비극 ㅡ정치 예술에 기여한 영화 감독' 이라는 글에 따르면, 히틀러는 이 영화에 대해 "나치를 독일의 구세주로 만들었고, 민중 공동체를 부르짖으며 나치 사상을 널리 전파한 영화" 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레니는 한 편의 영화로 독일 영화계의 최 정상에 섰다. 히틀러는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언론과 각종 매체를 중요하게 여겼는데,<의지의 승리>는 그에게 더 큰 확신을 주었다. 젊은시절 한때 예술가를 꿈꾸었던 히틀러는 영화의 정치적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엇다. 그는<의지의 승리>처럼 선동성이 강한 영화야 말로 자신의 뜻대로 민중을 선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그토록 레니를 소중히 여겼던 것은 그녀가 히틀러의 정치적 목표와 예술 감각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 말고는 나치 사상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의지의 승리>는 베니스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이후 레니는 국제 올림픽위원회의 요청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한 <올림피아>라는 테마 영화를 만들었다. <오림피아>는 특정 정치사상을 종교화하며 정치 영화 진수를 보여준 인체의 아름다움과 사상의 숭고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자 나치를 위햐 영화를 만들었던 레니는 화를 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군에 체포된 후 프랑스로 이송되어 인스부르크 여성구치소에 갇혔다. 결국 레니는 나치주의자가 아니라 나치동조주의자라는 판결을 받았으나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구 후 그녀는 몇 번이나 영화계에 복귀하려 했지만 수많은 영화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포기란 없다

 

  한순간의 실수로 레니는 잔인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여전히 예술적 영감과 창조력이 샘솟았고, 그대로 주저 앉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제기에 도전했다.

  1956년,레니는 아프리카 수단의 노바 부족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다. 그녀의 목표는 이 신비한 고대 부족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2년, 그녀는<노바>라는 사진 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사진 집은 인류학적 연구 가치를 인정 받았고, 전 세계 사진 마니아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녀는 1971년부터 스킨스쿠버를 즐기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68세 였지만 스킨 스쿠버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 52세로 나이를 속였다고 한다. 결국 자격증을 취득한 레니는 1977년 수중촬영에 도전했다. 그녀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인도양, 홍해, 몰디브 등을 거치면서 쉬지 않고 촬영했다. 그리고 이때 찍은 사진들을 모아 <산호초 화원> <특이한 바다 세계>라는 사진집을 발표했다.

  1987년, 레니는 5년을 바쳐 완성한 자서전 <회고>를 발표했고, 2002년 백 살의 나이로 <수중 감상>이라는 영화를 내 놓으며 드디어 재기했다. 이같이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2003년 9월8일, 독일 바이에른에서 수면중 조용히 막을 내렸다.

  

레니 리펜슈탈  Leni Riefenstahl

*1902년 8월22일 베를린의 가난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 났다.

* 1932년 각본, 감독, 연기자 까지 1인 3역을 한 <푸른 빛>으로 베니스 영화제 은상수상하였으며 같은해에 히틀러와 만나게 도었다.

*1933년 히틀러의 요청으로 나치의 기록 영화<의지의 승리>를 촬영.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념 테마 영화 <올림피아> 촬영

*2003년 9월 8일 향년 101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타계한 레니 리펜슈탈과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42.195킬로 결승점, 한 점 웃음기없이 무표정하기만 한 우승자 얼굴은 일거에 리펜슈탈의 넋을 흔들어놓았다, 이후 리펜슈탈은 자신의 인생에 깊은 감명을 남긴 대표적 인물로 손 기정을 꼽았다. 이런 손기정이 훗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결승선에 들어오 며 손 키스 장면을 연출한 황영조에게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선수의 모습이 아니다 "라고 꾸지람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히틀러와 악수를 나눈 손기정은 우승 3일 후 리펜슈탈의 대저택으로 초청받는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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