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에비타 에바 페론 Evita Eva Peron

일기님 2009. 9. 30. 13:48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장미

에비타 에바 페론 Evita Eva Peron

 

 

 

ㅡ "날위해 울지말아요. 아르헨티나여, 난 절대 여러분을 떠나지 않아요. 그 황량했던 시절에도, 그 힘겨웠던 시절에도 난 내가한 약속을 지켰어요."

 

 

" 날위해 울지말아요. 아르헨티나여, 난 절대 여러분을 떠나지 않아요."

  이것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퍼스트레이디 에비타를 추모하는 노래의 일부다.

  에비타는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자신의 꿈을 키우기 위해 늙은 가수에게 몸을 바쳤고, 생계를 위해 거리를 배회하다 무희가 되었다. 그리고 타고난 미모로 권력자들과 가까워짐에 따라 *페론 장군과 우연히 만나게 도었고, 이를 계기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면 팜므 파탈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법하지만, 페론 장군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탁월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자신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에비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 했던 에비타는 항상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그녀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천사'라 칭송했다. 그러나 상류 사회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에바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여자라며 경멸했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에비타는 그토록 원하는 사회적 성공을 이룬 후에도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 하거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에비타를 기회주의자라 비난하는 이들 중 그녀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민중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에비타는 지금가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고단했던 유년 시절

 

  에비타는 1919년,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암소 한 마리와 낡은 수레를 주고 데려온 두번째 부인이었다.아버지가 처자식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에비타의 어머니는 바느질 일을 하며 힘겹게 다섯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불행한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직 가난과 절망만이 그녀와 공존했고, 그녀와 형제들은 또래 아이들에게 늘 놀림을 당해야 했다. '애비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고, 때로는 너무 억울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달려가면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사람은 몸은 가나하더라도 마음이 가난해지면 안된다. 멸시를 당하더라도 떳떳하게 행동하거라." 라고 타일렀다.

  어린 에비타는 잘 먹지 못해 삐적 말라 마른 장작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어머니를 닮아서 결코 기죽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다가 쫓겨나는 일을 당했는데, 이날 그녀는 '중산층이 뭐 별거야? 나는 그것보다 더 큰 사람이 될꺼야.' 라고 굳게 결심했다. 훗날 에바타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가나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되듯, 이들은 가난이라는 독약에 길들여지지요. 그러나 나는 달라지고 싶었습니다.지독히도 가난의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에비타는 어린 나이에도 도시로 나갈 결심을 하게 된다.

 

스타를 꿈구며

 

  삶은 여전히 고달팠지만 에비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있는 유일한 길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배우의 꿈을 품은 에바타는 열다섯 살에 가수 마갈디를 만났다. 그녀는 결코 이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에비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위해 마갈디에게 몸을 허락하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꿈보다 잔혹하기 마련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 마자 마갈디는 오갈곳 없는 에비타를 냉정하게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에비타는 다시 한번 굳게 마음을 먹고 냉정한 도시의 삶을 시작했다.살기위해 그녀는 뭐든지 해야 했다. 그때부터 술집, 극장, 여관 등을 전전하며 많은 남성들을 만났고, 조금씩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시골뜨기 처녀가 아니었으며, 세련된 도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당시 에비타에 있어 사랑이란 단지 목표를 이루기

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사진작가의 눈에 들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CF 모델, 사회자,영화배우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며 연예계 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에비타를 '악마의 입술을 가진 천사'라고 표현했다.

 

사랑 그리고 새로운 인생

 

  1943년 6월, 아르헨티나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이 쿠데타를 통해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페론 장군이다. 에비타는 페론 장군을 1944년에 벌어진 한 파티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한 눈에 그의 야망과 재능을 알아 보았다. 그는 당시 평등, 자유, 민주 원칙을 주장했고, 에비타 역시 이 원칙을 적극 지지했다. 에비타는 페론이 장차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고 아르헨티나를 구원항ㄹ 것이라 확신했다. 당시 마흔 아홉 살이었던 페런 역시 에비타의 미모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사이로 발전해 갔다. 두 사람의 밀회가 알려지자 아르헨티나는 발칵 뒤집혔다. 특히 상류층 인사들은 에비타를 천박한 기회주의자로 여기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그러나 에비타와 페론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항상 함께 했다.페론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에비타의 따듯한 마음에 반했다.

  에비타는 페론과 함께 평등민주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페론주의를 완성했고, 곧이어 아르헨티나에 페론 열풍이 일어났다.에비타는 뛰어난 친화력으로 사회 하층민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사회의 약자를 향한 전략이 적중하면서 페론의 인기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나 당시 아르헨티나의 혼란 속에서 페론은 반대파의 모략에 빠져 투옥되었다. 에비타는 감옥에 있는 페론을 대신해 더욱 열심히 민중의 힘을 끌어 모으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페론은 수감된지 5일만에 민중의 힘을 등에 업고 석방되었고, 에비타는 이제 페론 인생의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에비타의 소중함을 깨달은 페론은 그녀에게 청혼했고, 마침내 두 사람은 1945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부가 되었다.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페론은 1946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여 마침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에비타의 나이는 스물일곱 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에비타는 빈민 지원, 노동자 문제,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그녀는 공장, 병원, 고아원 등을 찾아다니며 소외 받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에비타는 누구보다도 가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빈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빈곤 구제를 목표로 삼고 가난한 사람들의 지도자를 자청했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당시 사회의 절대적 약자인 아르헨티나 여성의 대변인이 되어 여성의 인권 향상에 힘썼다.

  날이 갈수록 에비타의 명성은 남편인 페론 대통령을 능가 했고, 그녀는 민중의 우상이자 가난한 자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가정집에서는 하느님의 사진과 에비타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둘 정도 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에비타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뛰어난 외교 능력을 발휘하여 각국 수뇌부와 돈독한 관계를 만들었다. 페론의 여왕, 아르헨티나의 장미, 고난 속에 피어난 다이아몬드와 같은 수식어가 당시 그녀의 인기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에비타의 행복은 너무 짧았다. 해외 순방길에 오른 그녀는 프랑스에서 쓰러졌고, 병세가 위중하여 곧바로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투병 기간 중에도 여성의 선거권 획득을 주장했고, 병세가 호전되자 다시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또한 각종 사회사업  재단과 빈곤퇴치 센터를 세웠고, 중앙은행에  기구 전용 계좌를 만들었으며, 남편 페론의 곁에서 반부패 운동에 목소리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병원, 학교 건설 현장 등을 찾아 직접 페론주의를 강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까워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이때 아르헨티나 각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는데, 이틀 동안 일곱 번이 넘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49년, 페론이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무렵 에비타는 자궁암 판정을 받았다. 결국 에비타는 1952년 7월 26일 저녁 8시 25분, 아르헨티나 민중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서른셋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장미는 그렇게 시들어 갔지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내가 아르헨티나를 위해 죽는다면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세요. 그러나 아르헨티나여, 절대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아요."

  

에비타 에바 페론 Evita Eva Peron

*1919년 5월 6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외 라 유니온에서 태어났다.

*1935년 오스틴 마갈디를 만나 스타가 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성하였슴.

*1945년 10월 21잉 후안 도밍고 페론장군과 결혼.

*1952년 7월 26일 자궁암으로 사망하였다.

 

이사벨 페론 정권이 붕괴한 뒤 새로 들어선 정부는 에바 페론의 시신을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으로 옮겼다. 에바 페론이 죽은 뒤 24년만에 찾은 평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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