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알폰시나 스뜨로니Alfonsina Storni

일기님 2009. 10. 28. 02:21

바다속으로 걸어간 여인

 알폰시나 스뜨로니Alfonsina Storni

 

 ㅡ1938년 아르헨티나의 휴양지 마르 델 쁠라따에서는 익사한 여류 시인 알폰시나 스또르니(Alfonsina Storni, 1892-1938)의 시신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던 중 마침내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시골 출신에다, 독학으로 문학의 우주를 더듬어 찾아들었던 원죄로 거의 늘 엘리트 문인들에게 천박한 통속 문인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던 그녀, 더욱이 20살에 사생아를 낳고서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의식을 지녀서 아르헨티나 문단사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남성 문인들의 연회에 당당히 참여했던 알폰시나 스또르니.

  <알폰시나와 바다>의 노랫말을 보면 스또르니는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여류 시인의 모습만 담겨 있지는 않다. 시적인 영감을 구하기 위해 바다 밑으로 그녀를 유혹하는 오솔길에 몸을 내맡기는 문학혼 그 자체이며, 바다의 주민들이 거의 여신으로 승화된 알폰시나 스또르니 곁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도 담겨 있다. 마치, 평소 바다를 유난히 좋아하던 스또르니가 <바다 밑의 나>(Yo en el fondo del mar)라는 시에서 그리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이 이 노래에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가난이나 남녀차별 혹은 윤리적 편견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분노하는 전투적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살다 간 알폰시나 스또르니의  노랫말엔 여기저기 처연함이 짙게 깔려 있을 뿐 아니라 멜로디에 담긴 절절한 한스러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류 시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비하했던 아르헨티나 문인들의 편견과 오만함을 대신 속죄하는 진혼곡이 되어야만 진정으로 알폰시나 스또르니의 넋을 달랠 수 있음을 자곡가 아리엘 라미레스는 깨달으리라.

마르 델 쁠라따에서 보낸 생애 최고의 순간

 

  그녀가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마르 델 쁠라따(Mar del Plata)는  알폰시나 스또르니를 기리는 조각이 남아 있으며, 그녀에게 생애 최고의 환희를 안겨준 곳이기도 하다. 1925년 마르 델 쁠라따에서 열린 <제1회 시 축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모두 참석하는 대규모 대회는 분명 아니었다. 스토르니와 그녀의 지인들끼리 주도한 이벤트 성격의 대회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축전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자그마한 상징적인 행사였다. 아마도 이 축전에 참가한 문인들조차 깨닫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도 아르헨티나만큼 서구를 동경한 나라도 없다. 아르헨티나가 융성기를 맞이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파리처럼 노천 카페가 들어설 수 있도록 부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를 정비하는 일이었을 정도다.

   18, 19세기의 프랑스식 살롱 문화를 가장 동경한 곳도 아르헨티나였다. 살롱 문화가 유행했을 때 문학 활동은 순전히 부자와 엘리트 지식인이 모이는 살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세기 아르헨티나 지성사의 한 주역이었던 에체베리아가 프랑스에서 귀국 후 문학 살롱을 열고 지식인들의 교류를 도모한 일이 그 좋은 사례이다. 19세기말, 20세기초의 아르헨티나는 서서히 살롱 문화에서 탈피하는 징후를 보였다. 각종 신문과 잡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문인들이 늘어났고, 동인지와 계간지를 중심으로 한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문학은 여전히 엘리트를 위한 기호품이었고, 살롱 문화 역시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었다. 스또르니 시대의 문인들이 방께떼(banquete)라 불리는 연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면서 '평민'들의 접근에 폐쇄적이었던 점이 이를 입증한다. 대중들 앞에서 문학을 논하는 강연회가 마련되는 일도 곧잘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인들은 그저 대중 위에 군림할 뿐이었다.

   그러나 휴양지인 마르 델 쁠라따에서 시 축전을 개최한 문인들은 좀더 대중들과 교감하기를 원했고, 그럼으로써 자신들도 모르게 문학의 민주주의로 가는 물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회 기간중 스또르니는 가장 많은 자기 작품에 싸인을 해준 작가였으며 행사 후에도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가장 친밀한 인사를 받은 작가였다. 그야말로 '속물 여류시인'의 설움을 깨끗이 씻은 축제였다.

 

속물 여류시인의 설움

 


  사실 스또르니는 잠깐의 무명 시절 외에는 늘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마르 델 쁠라따의 시 축전 이전에도 그녀의 시집은 재판을 찍고는 했다. 오늘날의 시인들도 누리기 힘든 성공을 연거푸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또르니는 늘 '속물 여류시인'이라는 차가운 눈초리에 시달렸다.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문학 조류에 한참 '낙후된' 스또르니의 시 경향 때문에 속물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최첨단' 전위주의 실험시가 아르헨티나 문단에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건만 그녀의 시는 너무도 쉽게 읽혔다. 실험 정신의 결여는 마치 스또르니가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로 비추어졌으니, 능력도 없으면서 시를 쓰는 속물이라는 비아냥이 늘 따라다녔다.

   사실 스또르니의 문학적 소양은 변변치 않았다. 몰락한 집안에서 성장한 스또르니에게 문학적 소양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찌어찌 사범학교를 다녔지만 시골 교사 자격증 주는 정도의 학교에 불과했으며, 학창 시절에 쌓은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사범학교의 보잘 것 없는 도서관의 몇 권 안되는 책을 수없이 빌려 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교사로 발령 받은 직후 고작해야 동아리 수준의 문학 모임에서 습작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오래가지 못했다. 이 문학 모임에서 스또르니는 유부남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고,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교사직을 버리고 무작정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하여 생계 유지를 위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결국 스또르니는 거의 홀로 심연을 더듬으며 아스라이 비치는 문학의 성좌로 향하는 길을 찾아가야 했으니, 대부분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정기적인 연회에 나가 늘 문학을 논하던 대부분의 당대 '엘리트' 문인들 입장에서 볼 때 애초부터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속물 여류시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또 한가지 이유는 보통 그녀의 독자가 통속적인 신문 연재소설에나 열광하는 여성층이었다는 점이었다. 감상에 젖어 사랑 타령을 하는 쉬운 시나 끄적였기에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며 그녀를 폄하하곤 했던 것이다.
  세월은 더욱 잔인했다. 후대의 문학사조차 '속물 여류시인'의 시에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스또르니는, 언제 그렇게 인기를 누렸는가 싶을 정도로 잊혀져만 갔다. 적어도 페미니즘이 그녀를 바다에서 다시 건져 올릴 때까지는 그랬다.

 

신열에 들떠 피를 토하는 영혼

 

  스또르니의 진정한 공헌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사생아를 낳았다는 손가락질에도 아랑곳 않으며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당당히 그리고 직설적으로 주장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시에는 아르헨티나 문학에서는 처음으로 남녀평등의 주제가 담겨 있다.

 

나는 늑대라네.
양떼를 짓밟았네.
평원에 지쳐
산으로 갔네.
무법천지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있네.

 

  위의 시에서는 여성이면서도 스스로를 '늑대'라 칭하는 대담함, 사생아를 사랑의 결실이라 부르고 양떼를 짓밟아서라도 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전대미문의 당당함은 이미 현대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적 순결함과 귀족적 품위와 정숙함을 여성의 미덕으로 여기던 아르헨티나 사회를 전율케 한 토픽이었다.

  사실 스또르니는 현대 아르헨티나 최초의 여류시인이라 부를 만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 그녀보다 먼저 시집을 낸 여성은 단 두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다. 에델리나 소또 이 깔보와 델피나 붕헤 데 갈베스가 그들이었다. 그러나 에델리나는 1844년 태생으로 1907년에야 첫 시집을 출간했다. 여자가 감히 시집을 낸다는 생각을 못하고 거의 평생을 보낸 셈이다. 또 델피나 붕헤는 프랑스어로 시집을 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살롱 문화의 유산이었다. 프랑스에 여류문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던 무렵 그들의 활동 반경은 살롱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살롱문화의 영향이 컸던 아르헨티나에서는 남성들의 고유 영역인 문학을 침범하더라도 프랑스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여성만은 용인해주었던 것이다따라서 스또르니야말로 사실상 최초의 현대 여류시인인 셈이다. 더구나 그녀는 에로티즘에 있어서도 선구자였다.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니라 육체의 사랑을 직설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성을 탐닉할 자유가 있음을 선언하였고, 나아가 남성을 정복하고 버리는 여인상을 시에 담기도 했다.

  스또르니의 작품 세계는 삶의 경험에서 진정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새로운 주제를 아르헨티나 문학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 아닌 한 가장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또르니의 시 <벌거벗은 영혼>(Alma desnuda)의 한 구절이야말로("피를 토하고 끊임없는 신열에 들뜬 영혼") 그녀의 고단한 삶과 울부짖는 영혼을 잘 요약하고 있다.

   1938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한 대학은 처음으로 스또르니와 가브리엘라 미스뜨랄(Gabriela Mistral), 후아나 데 이바르부루(Juana de Ibarbourou) 3인의 여류시인들만을 위해 강연회를 개최하게 된다.

  가난에 몸서리치면서도 우체국에서 전보 용지를 훔쳐 일상의 고난에서 일탈을 꿈꾸었고, 사생아를 임신하여 어찌 세상을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메트로폴리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속물 여류시인이니 별종(rareza)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남성 문인들의 전유물인 방께떼에 끼어 들어 그들과 대등하게 교류했던 스또르니가 마지막 영광을 누린 강연회였다. 그리고 신열에 들떠 피를 토하는 삶을 살았던 스또르니는 귀중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는 훌륭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이다.

 

<잠을 자려네>

  

   1938년 아르헨티나의 휴양지 마르 델 플라타(Mar del Plata)에서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던 알폰시나 스뜨로니는 죽기 며칠 전, 일간지 나시온에 보낼 최후의 시<잠을 자려네>를 썼다. 이미 자살을 결심한 그녀는 푹 잠을 잘 수 있도록 유모에게 등잔불을 낮춰달라고 부탁하고, 찾는 이 있어도 내버려둬 달라는 내용의 시를 남기고 그녀는 스스로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않았다.

 

 <알폰시나와 바다>

 

그대의 가녀린 자취는 파도 어른대는
고운 백사장으로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
한과 침묵이 감도는 호젓한 길은
바다 속 깊이 다다랐네.
삼켜버린 한이 서린 호젓한 길이
물거품 속으로 사라졌네.

 

그대가 얼마나 큰 고뇌에 잠겨있는지,
고동들이 웅얼거리는 노래에
포근히 기대려고 얼마나 크나큰
오랜 고통을 삼키고 있음을 신은 알지.
어두운 바다 밑바닥에서
고동들이 부르는 노래에.

 

알폰시나여, 고독을 안고 가는구려.
어떤 새로운 시를 찾으러 갔나요?
소금기 어린 해묵은 해풍이
그대 영혼을 어루만지며 데려가는구려.
그리고 그대는 꿈에 취한 듯
바다의 옷을 입고 그리로 가네.

 

다섯 인어가
해초와 산호초 길로 인도하리니.
반짝거리는 해마들이
옆에서 원무를 그릴 지며
어느새 바다의 주민들이
옆에서 노니리니.

 

유모, 불을 조금 더 낮추고
편안히 잠들게 해주오.
그가 전화해도 없다고 해주오.
알폰시나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주오.
그가 전화해도 꼭 없다고 해주오.
내가 가버렸다고 해주오.

 

알폰시나여, 고독을 안고 가는구려.
어떤 새로운 시를 찾으러 갔나요?
소금기 어린 해묵은 해풍이
그대 영혼을 어루만지며 데려가는구려.
그리고 그대는 꿈에 취한 듯
바다의 옷을 입고 그리로 가네.

 

알폰시나 스또르니의 최후는 이제 아르헨티나에서는 신화가 되었다. 예술가의 혼은 예술가만이 달랠 수 있는 법, 아르헨티나가 자랑하는 클래식 음악가로, <크레올 미사>(Misa criolla, 1964)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이 노래는 오늘날에도 호세 카레라스 등이 부른 바 있다-아리엘 라미레스(Ariel Ramirez)는 <알폰시나와 바다>(Alfonsina y el mar)라는 노래를 작곡해(작사: 펠릭스 루나) 그녀의 처연한 죽음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따스하게 어루만지면서 또한 절절한 고통을 조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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