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사랑의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Camille Claudel
ㅡ로댕이 조각가로서의 갈채와 영광을 누리는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여인이 있었으니, 비련의 예술가 카미유 클로델은 영원히 로댕의 그림자로 남아 있다.
에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력과 열정이다. 열정이란 일종의 욕망이며, 이런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에술가에게 있어 사랑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에술가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 새로운 영감을 얻어 절정의 창작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시들었을 때 겪는 그들의 고통은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이들은 곧 다시 새로운 사라을 찾아 나선다. 예술가들의 삶 뒤에는 이러한 사건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런 삶에는 당연히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다. 잊혀지는 옛 사랑, 카미유 클로델이 바로 그런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대한 조각가로 로댕의 연인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녀는 로댕의 연인이기 전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였다.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의 만남은 이미 불행한 결말을 안고 시작되었다. 예술가란 본래 배타적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적으로 하나일지라도 그들의 사랑은 대부분 불해으로 끝나고 만다. 결국 클로델은 로댕과의 충격적인 이별 때문에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그녀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들을 깨부수고, 30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혹자는 *로댕이 천재 여성 예술가의 운명을 철저히 파괴했다" 며 비난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불해은 단지 시대적 산물" 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녀의 삶은 비참했고, 세상은 천재 여류 조각가를 잃었다.
천재의 자유분방했던 유년 시절
카미유 클로델은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데파르트망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클로델의 부모는 1년 전 낳은 사내아이가 15일 만에 죽었던 탓에 매우 아들을 갖고 싶어 했으나 클로델이 태어나 무척 실망했다. 그래서 클로델의 탄생은 별로 축복받지 못했다. 클로델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죽은 아들에게 집착했고, 때문에 모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났다. 클로델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냉담했다. 그러나 다행이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클로델은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클로델의 아버지는 그녀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대범했던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꽃이나 씨앗을 자세히 살펴보곤 했다.
1876년, 클로델 집안은 파리 교외 쉴 세느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1883년, 클로델을 예쁘게 본 한 지인의 소개로 당시 열아홉 살이던 로댕과 처음 만났다. 당시 로댕은 아직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기 전이었다. 도도했던 클로델은 첫 만남에서는 로댕을 별로 눈여겨 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
로댕은 클로델을 만나기 전에도 여자를 많이 사귀어 봤지만 그녀에게서 강한 매력을 느꼈다. 외모가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는 많았지만 클로델은 아주 신선하고 독특했다. 로댕은 클로델을 곁에 두고 싶어 자신의 작업실 조수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클로델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로댕의 작업실에서 다른 사람보다는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했다. 조각의 매력에 깊이 빠져든 그녀는 로댕과 함께 일을 하면 자신의 굼을 실현 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불태우며 남자들도 벅차게 여기는 작없을 거뜬히 해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클로델의 재능이 서서히 빛을 발하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 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조각에 대한 토론을 자주 벌렸는데, 어느새 자신이 토론을 주도하는 중심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고, 로댕조차도 그녀에게 종종 도움을 구했다. 그러다가 클로델이 로댕의 누드 모델이 되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급 진전했다. 클로델의 아름다움에 반한 로댕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클로델도 평소 로댕을 흠모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클로델은 로댕에게 새로운 사라을 가르쳐 주었고, 그런 그녀를 통해 로댕은 육체적인 사랑 아닌 정신적 교감을 배웠다.
사랑 그리고 이별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고 , 그럴수록 클로델은 더욱 열정적으로 조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888년 <사쿤탈라>로 파리 미술 전람회에 입상하면서 예술계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성 중심이었던 조각 분야에서 여자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였다.
클로델의 천재성이 발휘되면서 부터 그녀는 로댕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클로델은 로댕이 다른 여자 모델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것이 전적으로 로댕의 잘못이라 몰아붙이며 한동안 그와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클로델은 사람들이 자신을 로댕의 제자 혹은 연인으로만 보고 정작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 것이 무척 불만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스스로 인새의 패배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평생 조각에 몸 바치리라 결심했던 그녀에게 이러한 주변의 시선은 로댕의 배신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클로델이 인생 최대의 슬럼프를 겪고 있을 무렵, 로댕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델은 점점 초라한 조각가로 전락해 갔다. 그녀는 로댕과 몇 번의 이별을 반복하다가 결국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짧은 영광과 깊은 상처
로댕은 클로델과 헤어진 후 갈수록 창작의 힘을 잃어갔다. 그래서 그는 자존심을 굽히고 클로델에게 결혼해 달라고 청혼했다.로댕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이미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며 훨씬 성숙해져 있었고, 그것은 그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결국 1897년 , 클로델은 로댕의 수석 조수로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클로델도 다시 명성을 되찾아 그해 5월에 열었던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그녀의 작품 <<화가>와 <성에 사는 소여주인>은 세간으로 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또다시 세상으로부터 잊혀져 갔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여서의 재능이 제대로된 평가를 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클로델이 불행해질수록 로댕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술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로댕에게는 저절로 부와 명예가 뒤따랐고, 많은 여자들이 그의 연인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러나 이미 젊ㅁ음을 잃은 클로델은 거친 작업복을 걸치고 어두운 작업실에서 대패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울분이 끓어올랐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릴 수 밖에 없었던 걸까? 로댕과의 사랑은 클로델에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혹은 그녀가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 혼자서 남성 중심 사회를 바꿔놓기란 역부족이었으리라.
오로지 침묵뿐
1913년 3월 10일, 클로델의 동생 폴은 누나가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그녀는 잔인한 현실과 아픈 사랑의 상처 앞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그 후 클로델은 30년간 파리 교외의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다. 그리고 1917년 11월 19일 , 로댕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1943년 10월 19일, 클로델도 차가운 병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크로델은 '남은 것은 오로지 침묵뿐' 이라는 메모를 남기고 세상과 작별했다.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페렝 타르데누아에서 출생하였다.
*1888년 파리 미술 전람회에서 <사쿤탈라>를 발표하여 조각가로 인정받았다
*1913년 정신병원 입원
*1943년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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