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여성 을 부르짖은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ㅡ시몬은 요부도 아니었고,지체 높은 공주님도 아니었다. 그녀는 격변의 시대에 여성의 존엄성을 부르짖은 여성운동의 선구자 였다. 특히 시몬은 사르트르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의 영향 아래에서 자유와 실존주위를 부르짖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실존주의 거장 "샤르트르의 결혼은 세계 철학 사상 가장 위대한 결합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독특한 사랑 방식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아 이들의 관계를 사랑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물론 두 사람이 한때 열렬히 사랑하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이들의 사랑 표현은 매우 전위적이었다. 시몬과 사르트르는 세속적인 결혼의 틀 안에서 부부라는 인연으로 평생동안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지만 세속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에 대한 신비의 베일을 벗기다 보면 종종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시몬과 사르트르의 결혼은 두 가지 원칙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첫째, 상대에게 결코 거짓말 하지 않는다. 둘째, 상대를 속이지 않는다.이 원칙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시몬은 가문, 계층, 도덕, 종교 등 통속적인 사회적 관념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사르트르와 결혼을 감행했고, 그 결과 자유로운 삶을 얻었다.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형식적인 틀을 유지하면서도 종종 애인을 두곤 했다.시몬에게 사르트르 말고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자신에게 차가운 사르트르의 태도에 화가 나 혼자 미국 여행을 하던 중 작가 넬슨 올그렌을 만났다. 어던 관점에서 보면 시몬과 사르트르의 사랑은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연약한 존재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애정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으며서 우정이란 이름으로 간신히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사르트르는 말년에 서른 살 연하의 애인과 동거했고, 시몬은 동성애 성향을 보였다.
오늘날 시몬은 낡은 사고방식을 과감히 타파한 현대 페미니즘의 선봉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평생 사르트르라는 남성에게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녀의 새로운 신화 창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신여성의 탄생
시몬 드 보브아르는 실존주의 문학가의 대표주자로 사르트르, 카뮈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시몬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동시에 페미니즘 운동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여성 해방운동가였던 그녀는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 방식을 실천함으로써 당시 유럽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몬의 활동 분야는 소설, 희극, 수필, 평론, 자전 등 매우 다양하다. 그중 그녀의 대표작 <<제2의성>>은 무려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 서양 여성해방운동 역사의 성지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의 전 태통령 미테랑은 시몬을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라며 찬사를 보냈다.
시몬은 1908년 1월 9일, 파리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 부터 남달리 똑똑했던 그녀는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기에 스몬도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겼다.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거나 주변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시몬의 이러한 태도는 훗날 그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그 예로 그녀는 '행복이란 자신의 신념과 힘으로 만드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시몬의 어머니는 기독교 서적을 주로 읽었고, 달에게도 기독교 서적을 권유하며 자신의 바람대로 커주길 바랏다. 그녀도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기대대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차분히 종교 생활을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시몬은 관습과 금기를 깨는 것에 무한한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 후 시몬은 종교를 멀리하고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을 비롯하여 다양한 서적을 탐독했고, 서서히 자신만의 신념을 세워나갔다. 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쾌락이며, 어떤 이유로도 자신을 비하하거나 기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금기를 깨뜨린 그녀에게 더 이상 신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시몬은 열네 살 되던 해 '지구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움직인다' 는 사실을 알고 공포와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열다섯 살의 그녀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지겨운 건 딱 질색이야. 지겨우면 금방 고민스러워지거든."
새로운 사랑
매우 총명했던 시몬은 열일곱 살 때 이미 라틴 문학 학위와 초등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녀는 작가가 되기 위해 먼저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자신의 계획을 빈틈없이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1926년 3월에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다시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다양한 철학 서적을 탐독하던 시몬은 철학과 논리학 학위를 따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에 정진했다. 그리고 1927년 6월,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시몬은 철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힘을 길렀고, 1929년에 드디어 철학 교수 자격증을 땄다. 이날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 사르트르가 시몬에게 말했다.
"당신은 합격했소. 그리고 이제 당신은 나의 것이오."
두 사람은 보름 동안 자격시험을 치르면서 서로에게 끌렸던 것이다. 시몬과 사르트르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두 사람 모두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사르트르는 시몬에게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제안했고, 시몬에게 자신이 쓴 <<아르메니아인>>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시몬도 사르트르에게 자신의 글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냉정한 충고를 주고받았고,이때부터 시작된 정신적인 관계는 생의 마지막까지 게속 되었다.
시몬과 사르트르의 만남은 행운이자 불행의 시작이었다. 시몬은 사르트르를 자신의 오랫동안 꿈꿔왔던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자신처럼 열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일이든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르트르 또한 시몬에게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보호자를 자청했다. 그러나 그는 일부일처제를 거부하는 독특한 사상을 지니고 있어 남자든 여자든 많은 이성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르트르는 시몬을 사랑했지만 또 다른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몬은 이런 사르트르의 생각에 동의 했고,두 사람은 절대 서로에게 거짓말 하거나 속이지 말자고 약속하였다. 사랑, 일, 앞으로의 계획, 지난 경험 등 모든 것을 상대방과 공유하며 솔직히 말하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시몬은 사르트르를 만나 행복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와 헤어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르트르는 시몬에 대해서 "그녀는 남성의 지성과 여성의 감수성을 모두 갖춤과 동시에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 역시 갖춘 여성이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감정과 행동은 철저하게 상대바의 평가를 거치며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갔다. 1966년에 한 기자가 사르트르를 인터뷰하면서 시몬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어떤 면에서 나의 모든 것은 그녀의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글을 썼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평가를 받고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이에 대해 시몬도 "우리는 한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하니,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깊은 관계입니다. '너와 나' 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한 정신적 교감과 달리 애정 문제 만큼은 처음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고, 그 결과 별거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시몬고 사르트르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대화를 멈추지 않았으며 서로의 조언을 바탕으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에 대해 시몬은 "우리가 말하는 교감은 무엇이든 함께 결정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페미니즘을 위하여
시몬은 1940년부터 1946년 까지 << 초대 받은 여자 >>, << 피뤼스와 시네아 >>, << 타인의 피 >>,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 << 어떤 전 후 >>, <<도덕이상주의와 정치현실주의 >>,<< 실존주의와 민족의 지혜>>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 타인의 피 >>는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시몬은 이 책에서 *레지스탕스의 저항을 중심으로 자유와 책임에 대해 역설했는데, 여기서 '모든 개인이 타인과 함께하면서 느끼는 원시적인 불행' 이라는 표현이 특히 주목받았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카뮈는 이에 대해 최고의 걸작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은 2년 동안 무려 서른두 번이나 재판될 정도로 높은인기를 끌었다.
1946년, 시몬은 형이상학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 << 사람은 모두 죽는다 >>를 발표했다. 시몬은 이 소설 출간 당시 "다른 어떤 책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책" 이라고 자찬했다. 이 책은 후에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실존주의 철학의 걸작으로 인정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 책과 더불어 실존주의는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교황.' 시몬은 ' 사르트르 성모' 라는 칭호를 얻었다.
사실 시몬은 오늘날 실존주의 보다는 페미니스트로 더 유명하다. 1949년 6월 << 제 2의 성 >>이 출간되면서 그녀는 논쟁의 초점이 된다. 시몬은 이 책을 통해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길 바랐고, 그녀 자신이 그 모델이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 제2의 성 >>은 당시는 물론 지금가지도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1974년, << 제2의 성 >> 출판 25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프로그램에서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소개 되었다.
" 이 책은 처음으로 여성 문제를 거론한 상당히 난해한 책 입니다. 마르크스의 << 자본론 >>이 공산주의자의 성서라면 <<제2의 성>>은 현대 페미니스트의 성서입니다."
시몬은 게르마네 드 스탈의 지혜와 조르주 상드의 감성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실존주의 성모이자 위대한 페미니스트 시몬은 1984년 4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o Beauvoir 프랑스의 소설가, 철학자
* 1908년 파리에서 출생.
*1929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결혼.
*1949년 6월 대표작 << 제2의 성 >> 발표.
* 1986년 4월 사망
실존주의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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