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판위량 潘玉良

일기님 2009. 9. 24. 12:33

그림에 인생을 건 여인

판위량潘玉良

 

 

ㅡ기녀 그리고 첩으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꺼질줄 몰랐다. 천신마고 끝에 프랑스에서 전설적인 여류 화가가 된 판위량의 삶은 그러나 언제나 외로움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중국현근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 판위량,그녀는 20세기 초 서양미술교육을 받고 예술에 대한 불타는 열정 하나로 힘겨운 삶을 이겨낸 여인이다. 판위량은 중국 최초로 누드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자신이 직접 누드 모델이 되어 누드 자호ㅓ성을 그렸다. 그러나 그녀의 사상은 당시 중국의 봉건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 도덕적이고 불건전한 것이었다.

  판위량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장 문제 삼는 것은 바로 그녀의 출생과 성장 배경이다. 고아로 자라 기생으로 살다가 첩이 되어 운 좋게 미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후 그녀는 대학 교수이자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경력을 문제 삼으며 그녀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까지도 판위량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판위량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누드와 관련된 논쟁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 누드에 열중했다. 그래서 오늘날 이런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판위량은 분명히 중국 현대 미술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화가이다. 그녀가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중국의 전통적인 회화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는 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의 강한 개성도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쉬페이홍을 비롯한 일부 중국 화가들은 " 판위량이야말로 도특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 위대한 화가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을 솔직히 표현하는 데 집중했던 그녀,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예술 작품을 넘어선 그녀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암울한 유년 시절

 

  판위량은 1895년 장수성 양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슈칭張秀淸이고 가까운 사람들은 그녀를  위량玉良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는 바람에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외 사촌은 오갈 데 없는 판위량을 처음에는 잘 거두어 주었지만, 그녀가 13살 되던 해 도박 빚을 갚기 위해 무호헌의 한 기생집에 팔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기생이된 판위량은 화류계 생활이 너무나 고통 스러웠다. 그래서 몰래 도망도 치고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 하였지만 번번이 실패 하였고,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되었다. 판위량은 열일곱 살 때 이미 빼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근 지역에서 명기로 이름을 날렸고, 얼마후 판찬화를 만나 화류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판찬화는 판위량의 인생에 있어 매우 소중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를 만남으로써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받았고, 화가라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혈혈단신으로 외롭고 비참하게 살 줄 알았던 판위량은 판찬화에게서 따듯한 가족의 정을 느꼈다. 판찬화는 그녀보다 열두 살이나 많았고 이미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지만, 두 사람은 1913년 부부의 연의 맺었다. 결혼 후 판위량은  판 씨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였다.

 

회화, 새로운 시작

  

 

  판위량은 결혼 직후 남편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고, 이때 판위량은 처음으로 회화를 접했다.

  1918년, 판위량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상하이미술대학에 지원했으나 그녀는 입학을 거절 당했다. 마침 당시 모델 문제로 한바탕 난리를 격은 직후라 상하이미술대학의 교무 주임은 기생이었던 판위량은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붎합격 처리되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판위량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그러나 리우하이수 교장의 특별한 배려로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렵게 얻은 기회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학생이 되었다. 이윽고 2학년이 되었을 때 인체 소묘라는 수업이 신설되었는데, 그전까지 풍경화에 두각을 나타냈던 판위량은 누드와 존재를 알고 혼란에 빠졌다. 누드는 보수적인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판위량은 누드화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먼저 그녀는 목욕탕의 여성을 그려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누드 자화상을 그렸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 나녀裸女 >이다. < 나녀 >가 처음 교내 전시회에 발표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리우하이수 교장은 판위량을 불러 어떻게 누드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물었다. 판위량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리우하이수 교장은 의외의 제안을 하고 나섰다.

  "판위량, 중국에서 서양회화를 시도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네, 차라리 유럽으로 가게, 내가 프랑스어 선생을 소개시켜 주겠네."

  이렇게 해서 판위량은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 하나로 파리에 첫발을 내딛었다. 파리에 도착한 그녀는 소묘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프랑스 국립 리앙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1923년, 파리 국립미술대학에 들어가 뤼시앙 시몬 교수 밑에서 수학 하였다. 이곳에서 판위량은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화가로 꼽히는 쉬페이홍, 리루이칭과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2년 뒤 로마 국립대학 회화과 주임인 캉라마 교수에게 실력을 인정 받아 이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유럽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세계적인 화가로 발돋음했다.

  1928년, 유화를 전공한 판위량은 다시 조각 공부를 하던 중 유럽 여행 중인 모교의 리우하이수 교장을 만났다. 리우하이수 교장은 판위량의 성공을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귀국해서 모교의 교수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판위량은 1928년 겨울, 9년간의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판위량은 상하이미술대학교 서양 회화과 주임이 되었고, 두 달 후 중국 여성 최초로 서양화 전시회를 열었다. 판위량은 이렇게 중국에서 십ㅇ 년간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러나 판잔화의 본부인과 갈등이 심해지자 파리만국박람회를 핑계로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 후 판위량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40년 넘게 이국땅에 머물렀다.

 

불행한 말년

 

  프랑스로 되돌아온 판위량은 프랑스 독립 예술전에 참여했고, 대표작 <나녀>로 미국, 영국, 이탈리아, 그리스를 돌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미술대회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판위량은 유화 외에도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는데, 그녀의 조각품은 현재 프랑스의 유명 박물관과 대학에 전시되어있다.

  그러나 이렇듯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판위량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다. 판위량은 성품이 너무 곧아서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데 서툴렀다. 때문에 그녀는 항상 경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말년에는 창작 활동마저 뜸해져 국가보조금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1960년, 사랑하는 남편 판잔화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져 모든 창작 활동을 중단함과 동시에 건강까지 잃었고,고향이 너무나 그리웠지만 중국에 문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귀국마저 물거품이 도었다.

  1977년 7월 22일, 판위량은 병마와 싸우다가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속의 울분과 아쉬움을 다 풀어버리지 못하고 한평생  타국을 떠돌다 객사하고 만 것이었다. 1985년, 파리주재 중국대사관의 노력으로 판위량이 남긴 유작 2천 점을 그녀의 고향인 안후이성 박물관으로 옮겼고. 그녀의 영혼은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판위량潘玉良

*1895년 장수성 양주에서 태어났다.

*1909년 판잔화의 첩이되었다.

*1918년 리우하이수가 설립한 상하이미술대학에 입학

*192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남

*파리국립미술대학에 입학

*1928년 귀국 상하이미술대학교 교수가됨

*1937년 프랑스에 정착

*1977년 7월 22일 파리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