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살인자 Pushkina
ㅡ"그녀는 가련한 여인입니다.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비난 받고 있으니까요." '탕' 하는 총성과 함께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 쓰러졌고, 그를 사랑한 한 여인은 고통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1837년 2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푸슈킨이 총에 맞고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위대한 시인은 이렇게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푸슈킨의 죽음은 러시아 문단에 큰 충격과 슬픔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의 원인을 파헤쳤고, 역사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천재 시인과 세기의 미인을 동시에 파멸로 이끈 사건이다. 아니, 위대한 시인을 교살한 것은 바로 이 천박한 여자이다.”
세기의 미인 혹은 천박한 여자로 언급된 이 여인은 바로 푸슈킨의 아내, 푸슈키나이다. 푸슈키나는 푸슈킨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얼굴만 예쁘고 교양 없는 경박한 여자’로
비난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푸슈키나가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가. 푸슈킨이 그녀를 위해 결투를 벌인 것이 푸슈키나의 잘 못인가? 아니면 푸슈키나가 푸슈킨과 결혼한 것이 잘못인가?
푸슈키나가 처음 푸슈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그때 푸슈키나는 러시아 최고의 미녀이자 푸슈킨을 숭배하는 문학 소녀였다. 아름답고 활달한 성격을 지녔던 그녀는 결혼한 뒤 수많은 남자들로부터 받는 구애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에게 거절당한 사람들은 그녀가 부도덕하다며 헛소문을 퍼뜨렸다. 푸슈킨도 이런 소문을 들었지만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소문들은 대부분 며칠이 지나면 다시 잠잠해 지곤 했다. 푸슈킨은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받는 것일 뿐 아내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푸슈키나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푸슈킨은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푸슈킨과 푸슈키나에 대한 모욕적인 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푸슈킨은 이에 크게 분노했다. 자신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사랑하는 애나를 모욕하는 일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내의 명예를 회복해 주리라 다짐했고. 이렇게 해서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위대한 시인은 비열한 음모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푸슈킨이 세상을 떠난 뒤 가련한 아내 푸슈키나는 평생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오해와 누명은 뒤집어쓴 채 살아야 했다.
천생연분
지난 백여 년 동안 푸슈키나는 푸슈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과 함께 온갖 저주를 받아야 했다. 혹자는 그녀를 문란한 여자라고 비난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녀가 남편에게 무관심한 아내였다고 욕했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는 1971년 그녀가 쓴 여섯 통의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비로소 풀렸다.
푸슈키나는 1812년 러시아 탐보프에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탈리아 콘차로바 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풍부한 감성을 지닌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궁중 관리였던 어머니는 외모는 출중했지만 성격은 다소 괴팍했다. 푸슈키나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그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아주 각별했다. 푸슈키나가 다섯 살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낙마 사고를 당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할아버지는 성품이 고약한 며느리에게 손녀딸을 맡길 수 없다며 직접 푸슈키나를 데려다 키웠다. 푸슈키나는 할아버지와 살면서 음악, 회화, 문학, 철학, 수학, 세계역사, 지리 등 많은 지식과 교양을 쌓았다. 특히 그녀는 언어 능력이 탁월하여 러시아,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그림, 음악, 춤도 매우 좋아했다. 푸슈키나는 소녀 시절부터 뛰어난 미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춘기 시절 그녀는 특히 푸슈킨의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그녀는 푸슈킨의 작품을 줄줄이 꿰고 있었고, 푸슈킨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1828년 12월, 푸슈키나는 평소 흠모해온 푸슈킨을 처음 만났다. 푸슈킨 역시 아름답고 재능 많은 푸슈키나를 사랑하게 되었고, 교제한 지 5개월 만에 정식으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푸슈키나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사랑에 빠진 푸슈킨은 푸슈키나를 포기할 수 없어 자신의 숭고한 사랑을 시로 표현하여 푸슈키나에 전했다. 마침내 푸슈킨의 진심이 푸슈키나를 감동시켰고, 두 사람은 깊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1830년 5월, 푸슈키나는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푸슈킨과 약혼했다. 푸슈킨은 푸슈키나와 사랑에 빠지면서 뜨거운 창작열을 불태우며 작가로서의 전성기를 누렸다.
부창부수
1831년 2월 18일, 수많은 러시아 남성들의 우상이던 푸슈키나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열세 살 연상인 푸슈킨과 결혼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푸슈킨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아내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하객들은 아름 다운 신부에게 찬사를 보내며 ‘두 사람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입을 모앗다. 푸슈킨의 큰형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립니다. 푸슈키나는 남편을 공경할 줄 알고, 푸슈킨은 아내를 무척 사랑합니다. 부디 하느님이 이들의 사랑을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라고 적었다.
푸슈킨은 아주 로맨틱하고 열정적인 시인이었다. 과연 천재적인 시인의 삶은 분명 보통 사람과 크게 달랐다. 그래서 푸슈킨의 친구는 푸슈키나에게 “위대한 시인의 아내로서 아마 힘겨운 삶을 견뎌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다.
결혼식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신부 푸슈키나는 침대 밑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남편을 발견하고는 남편의 사랑 앞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푸슈킨은 친구들과 열띤 문학 토론을 하다가 그녀의 존재를 밤새 까맣게 잊어 버리기 일쑤였다. 푸슈키나가 속상해 하자 용서를 빌면서도 이 같은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이들의 애틋한 사이에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푸슈킨과 푸슈키나는 차르스코예셀로에서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푸슈킨은 매일 아침 서재에서 글을 썼고,
이때만큼은 푸슈키나도 집 안에 쥐 죽은 듯 조용히 했다. 그녀는 가사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자수를 놓거나 책을 보며 지냈다. 그리고 가끔 남편 몰래 시를 TMau 자신이 쓴 시를 남편에게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해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푸슈킨도 점차 아내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푸슈키나는 남편을 위해 장편 시 <콜롬나의 작은 방>을 지었다.
푸슈키나는 어느 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고, 가사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사교 행사에 참석했다. 사실 그녀는 가사 일은 물론이고 경제적 문제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푸슈킨도 그런 아내를 대단히 여기며 고마워했다. 푸슈키나는 애초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교 모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고 한다. 모임에 나가더라도 별로 말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후에 그녀가 친오빠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대도시에서는 우정이란 것을 찾기 어려워요.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일 뿐이에요. 그리고 진정한 우정보다 오락과 재미를 찾는 일에 빠져 있어요]
푸슈킨이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푸슈키나는 항상 남편을 격려하고 응원했다. 1836년 푸슈키나가 오빠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남편이 힘들어 할 때 아내가 힘이 되어주어야 하고,
가족에 대한 경제적 의무를 남편에게만 지우는 일은 불공평하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푸슈키나도 궁핍한 사람살이에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전혀 내삭하지 않고 오빠에게 몰래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면서 그 사실을 남편이 알지 못하도록 숨겼다. 푸슈킨이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창작에만 열중하도록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영원한 이별
푸슈키나의 미모는 온 러시아를 들썩이게 만들 정도였다. 수많은 남성들이 푸슈키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외교관인 단테스와 러시아 황제도 그녀에게 반했다. 하지만 이것을 푸슈키나의 잘못으로 돌린 순 없다. 푸슈키나는 언제나 남편에게 솔직했고, 남편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푸슈킨이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위대한 시인 부부는 비열한 음모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치밀한 게획에 의해 단테스는 푸슈키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녔고,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소문은 점차 푸슈킨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발전했다. 아내의 결백을 굳게 믿었던 푸슈킨은 djEJs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느꼈지만, 아내의 명예를 위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정했다.
1837년 2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벌판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불행히도 위대한 시인 푸슈킨은 상대방이 쏜 총에 맞아 힘없이 쓰러졌다. 푸슈킨은 사경을 헤매면서도 아내에게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소.”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틀 후 러시아 문학의 거장 푸슈킨은 사랑하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푸슈킨은 죽기 전까지 “푸슈키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며 아내를 변호했고, 푸슈키나는 남편을 기리며 꼬박 7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푸슈킨이 세상을 떠나던 당시 푸슈키나는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다. 이후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구애해 왔으며 푸슈키나는 모두 뿌리치고 평생 혼자 살았다.
1841년, 그녀는 남편의 묘를 이장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으며, 이후에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조용히 살았다. 자신을 둘러싼 온갖 루머가 끊임없이 떠돌았음에도 불구하고 푸슈키나는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녀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순수하고 마음씨 착한 여인으로서 현명한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였던 푸슈킨은 그런 아내를 가리켜 외모보다 마음 씀씀이가 더 고운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대한 시인의 위대한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그녀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푸슈키나 Pushkina 본명: 나탈리야 콘차노바
*1812년 러시아 탐보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았다
*1828년 평소 우상이었던 푸슈킨과 처음 만났다.
*1831년 2월18일 열세 살 연상의 푸슈킨과 결혼하였다
*1837년 2월10일 푸슈킨이 아내를 위해 결투를 벌이다 .총에 맞아 사망 하였다.
*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결투를 제의 한 것은 푸슈킨 자신이었다. 예전에 내가 배울땐 그랬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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