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루 안드레아스 잘로메 Lou Andrens Salome

일기님 2009. 9. 14. 00:01

지혜와 영감의 여신

 

루 안드레아 잘로메 Lou Andrens Salome

 

 

 

 

ㅡ잘로메의  삶은 사랑으로 점철되어있다. 그녀는 한 순간도 사랑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 사랑이 아무리 고통스러울 지라도 그녀에게는 그런 삶 자체가 진리였다.

 

 19세기 말 *인문주의 붐이 일어나면서 자아실현의 중요성에 눈을 뜬 여성들이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여는 등 자시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잘로메를 꼽을 수 있다. 잘로메의 소설은 당시에도 호평을 받았다. 독일의 문학 비평가 쇠르겔은 그의 저서<<시와 시대의 시인>>에서 잘로메의 사상과 영향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또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잘로메의 시를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잘로메는 확실히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훌륭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 잘로메가 아닌 니체, 릴케 프로이드의 여인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작가 잘로메의 능력이나 가치는 위대한 세 남자의 그림자에 가려졌고, 그녀는 단지 니체가 사모했던 여인, 릴케의 연인, 프로이드의 절친한 친구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잘로메와 이 세남자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단군 하지만은 않았다.

  잘로메는 그녀만의 풍격風格을 갖춘 독립된 작가였으면, 사람들의 재능을 일깨워준 잠재력을 가진 신비로운 여신이다. 그녀와 만났던 맘자들은 모두 이 여인으로 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들은 그녀를 만나 후 마음속 혹은 정신 속에 담아두었던 생명을 세상 앞에 내놓았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녀는 지혜와 영감의 여신이었다.

 

책과 함께한 유년 시절 

 

 

잘로메는 1861년 1월 1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루크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잘로메가 태어나자 러시아 언론은 이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러시아 황제도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잘로메의 부친 구스타프 잘로메는 러시아 명문가 출신 군인으로, 러시아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구스타프 잘로메는 황실 근위대 대장으로 ㄱ러시아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밖에서는 엄격한 장군이었지만 집안에서는 막내딸 잘로메를 각별히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잘로메는 어려서부터 공상을 좋아했다. 정원의 포도나무 아래 누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곧잘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잘로메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이야깃거리였다. 그녀가 이렇게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여러가지 신화와 전설을 들려 주었기 때문이가.

  1878년의 어느 날 잘로메는 친구를 따라 우연히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길로트라는 덴마크인 목사를 알게 되었다. 이날 잘로메는 큰 감화를 받았고, 목사에게 자신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고 편지를 섰다.길로트는 잘로메의 솔직함이 맘에들어 그녀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 후 잘로메는 길로트를 통해 종교사, 종교 사회학, 철학, 논리학, 문학, 희극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얻었고, 데카르트, 실러, 칸트, 루소, 볼테르, 쇼펜하우어의 작품을 접했다. 당시 잘로메는 그 심오한 사상을 모두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로부터 큰 영햐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학문의 즐거움에 빠져 지내던 어느날, 두 아이의 아버지인 길로트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해 왔다. 스승이었지만 때로는 아버지 같은 자애로움을 보여준 길로트였기에 그의 고백이 잘로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길로트의 사랑을 거절하고 1879년, 어머니와 함게 취리히로  유학을 떠났다.

 

니체와 잘로메

 

 

  1882년 4월, 잘로메는 이탈리아의 여성해방운동가, 말비다폰 마이젠부크의 소개로 니체를 처음 만났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니체는 친구 파울 레에게 부탁하여 그녀에게 청혼 하였지만, 당시의 잘로메는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며칠 후 잘로메는 어머니와 루체른으로 가는 길에 파울 레, 니체와 동행했다. 니체는 잘로메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직접 고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잘로메에게 마음을 전해달라고 파울 레에게 부탁한 후 먼저 루체룬을 떠났다.파울 레 역시 오래전부터 잘로메를 좋아 했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친구의 마음을 전달했다. 며칠 뒤 잘로메는 정식으로 니체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나 니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더 그녀에게 매달렸다. 잘로메는 니체를 존경하고 좋아했지만,그를 평생의 동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니체에게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 후 두 사람은 가가자의 길을 가기 위해 헤어졌으나 구준히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니체는 동생 에리자베스와 잘로메를 타우텐부르크 강연회로 초대했다. 타우텐부르크에서 다시만난 니체와 잘로메는 문학, 예술, 철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엇다. 당시 니체는 유명한 철학자 이자 교수였지만 절대 잘로메를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았으며,오히려 그녀에게서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 이 만남을 통해 두 사람을 관계는 마침내 니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으나 니체의 동생 엘리자베스 때문에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에리자베스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잘로메에게 수시로 상처를 주며, 그녀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니체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고, 잘로메는 혼자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무렵에 니체가 자신의 생각을 자꾸 강요하는 바람에 갈로메는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녀는 독립된 개체로서 존중받고 싶었지만, 니체는 그녀와 의견이 대립되면 그녀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갈로메는 이 문제로 니체와 다투다가 그를 떠나고 만다.

  잘로메가 니체와 헤어진 후 파울 레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니체의 동생 엘리자베스가 갈로메에게 '니체는 한순간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는 내용을 편지로 보냈고, 심한 모욕감을 느낀 잘로메는 니체에게 영원한 결별을 선언 했다. 잘로메와의 이별은 니체에게 크나큰 고통이었고, 그는 고통을 잊기위해 세상을 멀리하고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했다.

  한편,잘로메는 니체와의 이별한 후 정신분석에 괸심을 갖게 되었고, 잦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영원한 사랑

 

1885년 잘로메의 <<하느님을 향한 투쟁>>이 발표되자 독일 문단이 크게 들썩였다.많은 평로가들은 이 소설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887년 잘로메는 교수인 프리드리히 안드레아스와 결혼 했고, 이듬해에 천재 시인 릴케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잘로메와 릴케가 처음 만났던 그때, 릴케는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듯 정중히 모자를 벗어 잘로메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잘로메는 이 젊은 청년의 순수함과 열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1897년 10월 1일,잘로메가 베를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뮌헨에 있던 릴케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잘로메는 릴케에게 대학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라고 권유했으나 릴케는 세상과 부딪치며 인생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릴케의 문학 인생에서 잘로메와 함께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잘로메는 릴케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시인으로서의 능력을 일깨워 천재 시인을 탄생시켰다.

  1899년 4월 14일, 잘로메 부부는 릴케와 함께 잘로메의 고향, 러시아를 방문했다. 잘로메는 세련된 사교술과 가문의 힘을 빌려 릴케를 위한 사교 모임을 마련했고, 릴케는 이자리에서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톨스토이, 러시아 화가 파스테르나크,레핀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은 릴케는 베를린에 돌아오자마자 주옥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1900년 5월7일, 다시 러시아를 찾은 잘로메와 릴케는 *체호프와 고르키를 비롯한 유명한 작가를 만났고, 80세를 맏은 톨스토이와 재회했다. 이 여행에서 잘로메는 삶의 활력을 되 찾았고,릴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다.

  1901년 가을, 잘로메는 파울 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니체와 헤어진 뒤 오랫동안 파울 레를 잊고 지냈지만 그 역시 잘로메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당시 파울 레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라 자살로 추정되었는데, 그가 죽은 장소가 잘로메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곳이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파울 레는 잘로메와 헤어진 후에도 줄곧 그녀를 잊지 못하고 미친듯이 일에만 몰두하다 세상을 등졌던 것이다.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넜던 잘로메도 이때만큼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다가 심장병을 앓기 시작했지만 다행이 조금씩 호전되었다.

  잘로메는 괴팅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하인베르크 언덕 위의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곳에서 그녀는 당요병과 흉부 부종으로 고생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1937년 2월 5일 저녁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루 안드레아스 잘로메 Lou Andrens Salome

*1861년 1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 니체와 처음 만남

*1885년 소설<<하느님을 향한 투쟁>>으러 독일 문단에 대뷔하였다

*1887년 안드레아스와 결혼 했으며 1937년 2월5일 서거하였다.

'이슈메이커,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0) 2009.09.22
푸슈키나 Pushkina  (0) 2009.09.19
조르주 상드 George Sand  (0) 2009.09.09
마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0) 2009.09.05
예카테리나 Ekaterina  (0) 2009.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