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조르주 상드 George Sand

일기님 2009. 9. 9. 04:05

자유로운  인생

조르주 상드 George sand

 

 

당당히 고개를 들고 파이프를 입에  문 그녀는 종종 남장을 하고 거칠게 말을 달렸다. 그녀는 남자들 사이이에서도 눈에 띄는 남성미를 풍겼다.

 

 

 

조르주 상드는 여류 문학가로서뿐만  아니라 숱한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호사가들에 의해 과장된 면도 있지만, 그녀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맨 로맨티스트였음은 분명하다.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한 조르주 상드는 변호사 친구가 사랑을 고백해 와도 단호하게 뿌리치며 행복한 가정이 영위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이미 정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끼며 독신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사랑에 빠진 남자, 줄 상드의 이름을 따 '조르주 상드' 라는 필명을 지었다. 그러나 줄 상드와의 사랑은 금방 끝나버렸고, 그녀는 다시 천재 시인으로 유명한 * 뮈세를 만났다.

  그러나 뮈세와의 만남도 결국 그녀에게 불행을 안겨주었다. 겉보기에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지만, 실상 뮈세는 타고난 바람둥이 였다. 더구나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부터 뮈세의 주변에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성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뮈세는 점차 자아의식이 강한 조르주 상드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녀대로 위대한 작가가 아닌 이기적이고 평범한 남자의 연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르주 상드는 뮈세와 헤어진 후에도 쇼팽, 플로베르, 발자크 등 당대의 거장들과 숱한 로맨스를 만들었으나 결국 모두 헤어지고 말았다.

  조르주 상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렇게 수 많은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서 그녀의 삶은 점점 더 고독해져 갔다.

 

결혼

 

 

조르주 상드의 본명은 오로르 뒤팽이었고, 결혼 후에는 뒤드방 부인으로 불렀다. 나폴레옹 휘하의 고위 군관이 었던 그녀의 아버지와 평민 출신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아마도 조르주 상드의 반 사회적 기질은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듯하다. 조르주 상드가 네 살때 그녀의 아버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하면서 집안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파리로 떠났다.

  조르주 상드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사내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성격이 남성다워 졌다. 훗날 2년여의 시간 동안 수도원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녀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1820년 수도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조르주 상드는 부모에 이어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았고, 그 후 글쓰기, 피아노, 노래, 회화, 무용, 기마술, 사냥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배움을 지속했다.

  1822년 어느덧 숙녀가된 조르주 상드는 수 많은 구혼자들 중 잘 생기고 매력적인 카지미르 뒤드방과 결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서로가 전혀 다른 부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지미르 뒤드방은 종일 사냥과 파티 생각뿐이었고, 조르주 상드는 결혼이란 자유를 구속하고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설 창작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고자 했다.

 

사랑과 일

 

카지미르 뒤드방과 멀어진 후 조르주 상드는 청년 법관 오를레앙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오를레앙은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조르주 상드는 이를 거절했다. 조르주 상드는 오직 플라토닉적인 사랑만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르주 상드는 오를레앙과 헤어지고는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모든 고통과 시련을 잊기 위해 글쓰기에 몰두했다.

  1830년 노앙으로 돌아온 조르주 상드는 여러 남성들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 줄 상드라는 청년이 조르주 상드의 중성적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조르주 상드 역시 줄 상드에게 호감을 느꼈고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었다.당시 사람들은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가 자기보다 어린 남자를 꼬셨다" 며 조르주 상드를 비난했다. 그러나 조르주 상드는 주변의 시선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줄 상드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1831년 12월 그와 공동 집필한 장편소설<<장미와 백색>>을 발표했다. 조르주 상드는 이 소설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832년에는 <<앵디아나>>를 출간하여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앵디아나>>는 평논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신문등 언론 매체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특히 발자크는 이 작품에 대해 " 소박한 문체로 참신한 내용을 전ㄴ개한 훌륭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고 흐름이 매우 자연 스럽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마치 일상 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세익스피어의 소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라고 평했다.

  이후 조르주 상드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해서 신작 소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가 창작 활동에 열중할수록 줄 상드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 졌다. 그녀는 이제 겨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또다시 누군가에게 구속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자의식이 매우 강했던 그녀는 자신이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남성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결국 조르주 상드와 줄 상드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말을 맺었다.

 

뮈세 그리고 쇼팽

                                                                    

15

 

줄 상드와 헤어진 조르주 상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뮈세와 사랑에 빠졌다. 뮈세는 어려서부터 천재 시인으로 불렸던 위대한 시인이다. 1833년 봄, 한 잡지사가 주관한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호감을 느꼈고 뮈세가<<앵디아나>>에 대한 감상을 편지로 써 보내면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 후 두 사람은 많은 편지와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뮈세는 타고난 바람둥이였고, 금방 조르주 상드에게 싫증을 냈다. 자연히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고, 뮈세는 베니스의 술집을 전전하며 많은 여자들과 유흥을 즐겼다. 그리고 1834년 3월, 뮈세는 파리로, 조르주 상드는 베니스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조르주 상드는  약 5개월간 베니스에 머물면서 <<양 세계 평론>>,<<어느 여행자의 편지>> 등 이탈리아 풍속의 글을 자주 썼고, 당시 뮈세도 훗날 명작으로 꼽히는 서정시를 지었다. 그는 1836년 자전적 소설인<<세기아의 고백>> 을 발표 했다.

  조르주 상드는 한시도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뮈세와 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섯살 연하의 음악가 쇼팽을 만났다. 그녀는 병약한 쇼팽의 요양을 위해 시골 마을에서 생활했다. 두 사람은 마주르카 섬으로 여해을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쇼팽은 조르주 상드와 함께하는 동안 많은 예술적 영감을 얻었고 작고가로서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 무렵 조르주 상드 또한 대표작<<콩쉬엘로>>를 완성했는데, 그녀의 사랑, 역사, 철학, 교육, 사회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이 소설은 평론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얻었다. 서로에게 최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두 사람은 8년 가까이 행복한 시간으 보냈다.

 

사랑 그리고 창작

 

 

조르주 상드는 사상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그녀가 쓴 30년대 사회소설을 살펴보면 루소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무렵 그녀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사회주의자 피에르 르루와 교류하면서 이상적인 사회 건설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조르주 상드의 작품에는 공상사회주의 색채가 짙다. 그 후 점점 나이가 들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감에 따라 신앙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노동자, 여성 노동자, 미성년 노동자등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작품에 담아 냈다. 그래서 조르주 상드의 40년대 작품에는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사회 약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그녀의 전성기 였다. 1848년, 혁명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그녀는 자신의 소설과 편지를 널리 알리며 사회민주주의에 불을 붙였다. 그 결과 노동자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른바 평민문학이 탄생하기에 이르렇다.

  그러나 거침없이 혁명의 글을 써온 조르주 상드는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이윽고 노앙으로 돌아가 전원적인 삶을 살았다. 따라서 그녀의 후기 작품을 살펴보면 가벼운 필체로 순박한 지역 농민을 그린게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아직 사그러지지않은 평등, 박애, 평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몽환적인 이야기 곳곳에 표현되어 있다. 프랑스 문학가 *위고는 "한 줄로 광활한 대자연을 표현 할 수 있다니, 마치 이슬 한 방울로 하늘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녀는 우주에서부터 혁명, 인류, 동물, 요정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위대한 작가이다.  "라며 조르주 상드에 대한 극찬을 표했다.

  조르주 상드가 1876년 72세 나이로 낭트에서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진보주의자들과 문학가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녀는 독특한 중성적 매력을 지녔으며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회 바판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조르주 상드를 문란한 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녀는 다만 진실한 사랑을 갈구 했을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도 "나는 수많은 사랑을 해보았어요. 예술가의 사랑, 여성의 사랑, 자매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수녀의 사랑, 시에 대한 사랑........이 세상에 그 외의 또 다른 사랑이 있을까요?" 라고 말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영혼과 사랑에 대한 강한 열망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런 그녀의 삶 자체도 한 편의 소설이 아니겠는가.

  

조르주 상드 George Sand

*1804년 7월1일 프랑스 파리에서출생 했으며 본명은 오로르 뒤팽이다

*1832년 신문 연재소설<<앵디아나>>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876년 향년 72세로 낭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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