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을 원했던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 mariyn monroe
ㅡ부모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소녀에서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 여신으로...
전 세계 남성들의 영원한 여신 마릴린 먼로, 그녀의 외모와 행동 하나하나는 후배 여배우들의 우상이 되었고, 그녀는 지금가지 섹시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마릴린 먼로가 세상을떠나고 세기가 바꿔었는데도 아직가지 그녀는 아름답고 섹시한 사랑의 여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환상과 기쁨을 선사한 그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사실 그녀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아름다운 여배우는 많았다. 청순하고 우아한 오드리 햅번, 고상한 완숙미가 돋보이는 그레이스 켈리, 리타 헤이워드와 마를렌 디트리히등, 이때가지 여배우들은 모두 수줍은듯 살짝 미소 짓는 모습으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는 이 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 보였다. 먼로는 인간 본성에 가까운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특히 남자들은 그녀가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진정한 아름다움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 더 이상 수줍은 듯 자신을 감추고 감정을 자제하는 것은 통하지 않았다. 야성적이고 활기 넘치는 아름다움은 여성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남성을 지배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먼로를 천사 혹은 여신으로 여겼고,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그녀를 미워했다.
마릴린 먼로가 평생 찬사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 대한 사십거리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것은 바로 그녀의 사생활이었다. 먼로는 세 번 결혼하여 세 번 모두 실패했고, 자연 유산을 포함하여 열한 번이나 아이를 지웠다. 그녀를 농락하고 정복하려는 남자는 많았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 남자는 거의 없었다. 먼로는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와도 귾임없는 염문설을 낳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질타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항상 진실한 사랑을 갈망했던 그녀의 삶은 늘 비참했다. 자신이 베푼 사랑은 언제나 충격적인 결과로 돌아왔고, 그 때문에 수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나를 대해주길 바랐다. 나는 한 남자의 진실한 사랑이 필요했으며, 그랬다면 나 역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먼로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항변ㄴ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화려한 조명뒤에서 슬픈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가장 큰 바람은 평범한 여자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여신처럼 떠받들거나, 혹은 예쁜 인형을 가지고 놀 듯 그녀를 농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불행
스크린 속의 마릴린 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현실 속의 그녀는 매우 고통에 쌓여 있었다.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Norma Jeane Mortenson이며, 1926년 6월1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에서 아버지 없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영화 제작사에서 필림 편집 일을 했던 어머니는 가난에 찌들어 있었고,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결국 먼로의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환경 탓에 먼로는 따듯한 가정이 뭉엇인지, 어머니의 사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자랐다. 먼로의 삶은 마치 '여행용 가방' 과도 같았는데, 그녀는 수시로 짐을 싸 고아원, 위탁가정의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며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어린 시절의 먼로는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의 따듯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어리광 한번 부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홉 살이 되면서 먹고살기 위해 접시닦이가 되어야 했다. 굶주리지 않기 위해 또래 아이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그녀의 어린시절에는 즐거움, 행복과 같은 따스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오직 눈물, 고독, 배고픔, 고단함이 그림자처럼 그녀를 쫒아다녔다. 행복하고 즐겁기만 해야 할 나이에 먼로는 이미 인생의 쓴맛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먼로는 열세 살이 되고부터 타고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삶은 항상 고단하고 비참했지만, 그것은 마음의 상처일 뿐 그녀의 외모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먼로는 바로 이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진 수모를 겪어야 했다. 먼로에게는 여러명의 새 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들이 먼로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먼로의 어머니는 딸의 장래를 위해 그녀를 할리우드에 사는 동생에게로 보냈다. 바로 이곳에서 먼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할리우드로 옮겨온 먼로는 영화에 매료 되었고, 이후 영화사 앞에 늘어선 배우 지망생들 틈에 끼여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화배우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싹틔운 영화에 대한 열정은 그녀의 고달픈 인생에 있어 유일한 빛과 희망이었다.
섹시 여신 탄생
먼로가 스무 살 되든 해, 드디어 그녀의 아름답고 섹시한 외모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자와 카메라맨이 그녀를 찾아왔고, 하루아침에 그녀의 사진이 각종 잡지와 광고 사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먼로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아주 적었고, 그녀의 삶은 여전히 밑바닥을 벗어날 수 어ㅂㅅ었다. 먼로는 결국 잔혹한 운명앞에 다시 한번 무릅을 꿇고 말았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어쩔수 없이 누드 사진을 찎었고, 이때부터 누드모델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로의 누드 사진이 담긴 잡지가 발간되자 미국 사회 전체가 들썩였고, 잡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사진 평론가들은 "마릴린 먼로의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고혹적인 자태가 어우러져 매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라고 극찬했다.
얼마 후 20세기 폭스사가 먼로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구밈없는 아름다움, 독특한 매력,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영화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제작자들은 당장 먼로를 데려다 이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먼로는 모델 생활을 청산하고 스크린에 데뷔했다. 당시의 먼로는 순진하게도 자신의 오랜 굼이 드디어 이루어 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후 5년간 먼로가 맏은 역할은 보잘것없는 단역뿐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1953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먼로는 영화<나이아가라>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맞았다. 그러나 그 영화는 선정적인 포로노 영화였고, 그녀의 역할은 남자를 유혹하는 요부였다. 제작자들은 그녀의 섹시한 몸매와 고혹적인 자태로 관객을 글어 모아 돈 벌 궁리에만 몰두하였고, 영화는 온통 선정적인 장면으로 가득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미국 사회는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고, 먼로는 단숨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섹시 스타가 도었다.
이후 먼ㄹ호는 자연스럽고 감동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제작사들도 먼로의 연기를 인정했지만, 그들은 오로지 그녀의 섹시한 몸매와 미모를 이용해 계속해서 그녀에게 선정적인 장면이 담긴 포로노 영화를 찍게 했다. 관객들은 이에 열광했고, 제작사들은 큰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먼로는 훌륭한 연기로써 관객을 감동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정적인 장면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예술성있는 영화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고, 이후로<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버스정류장>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자연스럽게 순수한 연기를 선보였다. 다행히 먼로의 변신은 성공적이었고, 이를 토대로 그녀는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먼로는 진지하고 바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성실한 배우가 되고 싶었으며, 영화에 대한 열정 또한 높았다. 그러나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그녀의 이른 노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먼로를 이용하여 큰돈을 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먼로의 순수한 열정을 이용했고, '마린린 머로' 라는 황금 나무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당시 먼로는 이미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먼로는 제작자들의 인형이 되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다.
어절 수 없이 그녀는 이후에도 음탕한 요부 역할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제작사들은 계속해서 돈을 긁어모았다. 그 중에는 도가 지나쳐 혐오스럽기가지 한 영화도 있었다. 그녀의 선정적 영화 포스터와 나채 조각상이 도처에 넘쳐흘렀고, 불쌍한 고아 소녀는 그렇게 할라우드 최고의 섹시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의 섹시함에 현혹되어 이성을 잃었다.먼로가 가는 곳마다 쫒아다니며 소리 지르고광분하는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아름답고 신비스런 여배우 먼로는 점점 더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먼로는 수치심을 견뎌야 하는 중압감 때문에 늘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최선을 다해 이성을 지켰다. 그 후로도 그녀는 쉬지 않고 포로노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미 모든 의지를 잃고 정신적으로 매우 공허한 상태였다. 먼로는 당시의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다. 스크린 속의 먼로는 언제나 밝고 환한 얼굴로 쾌활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점점 더 침울해졌다.
먼로도 평범한 여자와 다름없이 살아보고 싶었다. 그녀도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는 따듯한 가정을 꿈꾸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이 그녀에게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꿈이었다. 세 번의 이혼을 겪은 그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잡초처럼 영원히 그녀만의 '가정' 을 갖지 못했다.
화려함의 그림자
먼로는 열여섯 살 때 이모집으로 옮겨간 후 제임스 도어티 james Dougherty라는 대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먼로 이모의 도움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흘러갔다. 사실 두 사람은 그다지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고,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결혼은 아직 어린 두 남녀의 불장난 같은 것이었다.
*25년간 LA 경찰서 강력계 근무
속사정이야 어쨌던, 먼로는 도어티와 결혼함으로써 잠시나마 안정적인 가정을 가질 수 있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게 2년이 지난후 도어티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도어티가 집으로 돌아왔을때 먼로는 이미 유명한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는 먼로가 모델이 되는것을 반대했고,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먼로는 갓 스물이 된 그해 이미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먼로는 7년간 독신으로 지냈다. 그렇다고 먼로의 이상형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먼로는 오직 진실한 사랑을 원했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줄 남자, 그녀를 따듯하게 감싸줄 수 있는 남자....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드디어 그녀는 꿈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를 만났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 선수인 조 디마지오Joseph Paul DiMaggio 였다.
*야구선수 아메리칸리그 1974년MVP 1963년 먼로 죽음 이후 매주 3차례 그녀의 묘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으며,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한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빠른 속도로 결혼에 돌입했다. 신혼여행으로 아시아 여행을 떠났는데. 그들이 도쿄 거리로 나가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그 인파 속에서 들려오는 외침은 모두마릴린 먼로를 향한 것이었다. 그때 처음 먼로의 인기를 몸소 실감한 조 디마지오는 먼로와 함께 있는 한 자신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게 되었다. 유명 스포츠 스타였던 그에게 있어 그것은 곧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었고, 급기야 먼로에게 영화배우를 그만두라는 요구를 했다. 마릴린 먼로의 두 번째 결혼은 이렇게 파국을 맞았다.
얼마 뒤 먼로는 뉴욕에서 할리우드의 유명한 극작가인 아서 애셔 밀러Arthur Asher Miller를 만났다. 5년전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흠모했었고,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불같은 사랑에 빠져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발표했다. 결혼식날 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아서 밀러를 바라보며 "지난 5년간 진심으로 흠모해 온 사람과 마침내 하나가 되었어요." 라고 말했다. 고독에 사무친 먼로에게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1955년 희곡<<세일즈맨의 죽음>>으로 퓰리처상 수상한 극작가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 밀러는 '먼로와의 결혼 생활이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만은 않다' 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작가라는 직업 특성상 평온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 아서 밀러와는 달리 활발한 성격의 먼로는 주변에 사람들이 붖ㅈ적이는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아서 밀러의 평온함을 깨버렸고,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먼로도 이 사실을 깨닫고는 행동을 조심하며 최대한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세 번째 결혼도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가. 워낙 마음이 여리고 감성적인 먼로에게 있어 세 번째의 실패는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1962년 8월4일, 마릴린 먼로는 로스엔젤레스의 자택에서 알몸으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경찰의 수사 결과 수면제 과다 복용에 의한 결론으로지어졌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타살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먼로의 죽음에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먼로의 죽음은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중 가장큰 원인을 할리우드에 돌렸다. 영국 <가디언>지의 사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세상은 먼로의 죽음에 대해 할리우드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빈민촌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아름답게 성장한 그녀는 훗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험난하고 고달팠다. 먼로는 평생 진정한 사랑과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꿈구었으나 세상은 그녀를 버렸다. 먼로는 죽는 순간까지 외롭고 쓸쓸했다. 그녀의 삶은 세상에 버림받고 상처받은 한 여배우의 비극물인 동시에 할리우드의 타락한 제작 현실과 자본주의 부패의 결과물이다.
마릴린 먼로 mariyn monroe
*1926년 6월1일 캘리포니아 주 LA 출생,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
*1953년 영화<나이아가라>에서 첫 주연 발탁, 이후 할리우드의 최고 섹시 스타로 발돋움.
*1962년 8월 4일 로스앤젤스 자택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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