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제조기
가브리엘 샤넬
ㅡ"이 세상에 공작부인은 많지만 가브리엘 샤넬은 오직 하나예요." "남들은 새로운 유행을 쫓지만, 난 유행을 만들어요."오늘날까지 유행을 선도하는 명픔 샤넬은 이렇게 탄생했다.
패션계에서 샤넬은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샤넬은 의류와 향수 브랜드이기 전에 한 여성의 이름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여인 샤넬. 그녀는 전 세계 여성들에게 패션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주었고, 그녀만의 스타일로 세계를 사로 잡았다.
샤넬은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 패션계의 거장으로 20세기 패션계를 뒤흔든 최고의 여성 디자이너가 되었다. 샤넬 스타일은 1920년~1930년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여전히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인류가 배출한 최고의 3대 디자이너로' 로 꼽는다.
그녀는 패션계에 남긴 업적 외에도 부유한 귀족과 예술가들을 상대로 숱한 염문을 뿌렸다.상류사회의 로맨스만큼 호식가들을 즐겁게 하는 화제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샤넬의 성공뒤에 연인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에 대한 진실은 그녀만이 아는 법, 이러한 스캔들은 샤넬의 신비로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평생 미혼으로 산 여인, 이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세인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샤넬은 분명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여인이다. 특별한 교육한번 받지 않았지만 디자인의 기본과 핵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그녀는 한마디로 천재였다. 천재라는 말 외에는 그녀의 업적을 평가하기 어렵다. 여기에 민첩한 손재주가 더해져 그녀의 천재성은 더욱 빛을 발했다. 샤넬은 옷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샤넬 이후 웃은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샤넬 NO5' 등 그녀가 남긴 수많은 작품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패션계의 총아 탄생
샤넬은 1883년 프랑스 루와르 강변의 작은 마을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본명이 가브리엘 샤넬인 그녀의 출생은 베일에 쌓여 있다. 사생아라는 설에서 부터 아주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까지 다양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의 출생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샤넬은 열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낸 뒤 열일곱 살에 수녀원에 들어갔다.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특히 가난한 여성은 제대로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샤넬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고민 끝에 제봉사 보조로 패션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계적인 디자인너가 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그녀는 윤기나는 새까만 머리 아담한 몸매, 반짝이는 눈동자 작고 오똑한 코가 매력적인 스무살 여성으로 자라났다.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샤넬은 성격이 활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인기를 한층 끌어 올려 준 것이 바로 그녀의 의상 스타일이었다. 평범한 흰색 티셔츠에 파란 쪼끼를 즐겨 입었던 그녀의 패션은 평범한 듯 보여도 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1910년, 그녀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기병 장교 에티엔 발장Etienne Valjean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티엔의 도움으로 파리에 모자 전문점을 열어 실용적이고 깜찍한 디자인의 모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그녀가 만든 모자는 파리 여성들에게서 큰 인기 몰이를 했고, 패션 잡지에 소개되면서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로써 이 모자 가게는 훗날 샤넬의 본사가 되었다.
1912년, 샤넬은 프랑스 상류 인사들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노르망디에 의상실을 열었다. 이곳에서 ㅅ그녀는 버튼 달린 셔츠, 운동복, 짧은 치마, 남성 버버리 코트 등을 내놓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샤넬은 자신이 만든 옷을 모델에게 입혀 거리를 돌아다니게 하는 홍보 전략을 이용했다. 샤넬의 예상대로 많은 여성들이 모델이 입은 옷을 보고 관심을 보였고, 이후 샤넬의 의류 사업은 승승장구한다.
천재 디자이너
1918년, 샤넬의 연인었던 보이 카펠Boy Copel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시기 누구나 그랬듯 샤넬도 위기와 맞닥뜨렸지만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가게를 지켜냈다. 어쩌면 그당시보다 더 불행한 유년 시절을 이미 겪었기 때문에 순간의 위기를 잘 극복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1924년, 샤넬은 검은색 슈트 형식의 예복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 활동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개성을 한껏 살린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여성복에 남성복 디자인을 가미한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직업 여성이 늘어나면서 실용성을 강조한 샤넬의 의상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후 샤넬은 바바리와 코트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회사는 고속 성장을 이룩했다. 샤넬은 뒤이어 웃과 함께 매치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우아함을 과시한 액세서리를 내놓으며 당시로는 파격적인 비즈 장식을 선보였다. 이처럼 샤넬은 수많은 성공을 거둔 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에 도전했다. 로맨틱 스타일, 이브닝드레스,플레어스커트,몸매를 드러내는 스타일, 주름치마 등 그녀가 내놓는 모든 스타일은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1920년대 초반 샤넬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 강봉가 31번지에 샤넬 디자인 사무실을 차렸다. 당시까지 샤넬 디자인을 가리켜 '고급스런 초라함' 이라 평가하는 이도 적잖았지만, 사실은 그 고급스런 초라함이야말로 샤넬의 성공 비결이었다.
1931년, 샤넬은 미국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대성공을 거두며 그녀의 의상은 미국 커리어 우먼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1920년대부터 토털 스타일링을 강조하며 의상뿐만 아니라 액세서리,화장품,향수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갔다. '여성은 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에 어울리는 우아한기품을 갖춰야 한다' 는 샤넬의 생각은 곧 그녀의 사업 마인드이기도 했다.
1921년, 에르네스트 보Emest Beaux 는 샤넬이 좋아하는 행운의 숫자 '5'를 붙여 '샤넬No5' 라는 향수를 선보였다. 이 향수는 출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마릴린 먼로가 애용한다는 말이 퍼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샤넬No5' 는 그녀에게 가장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로맨스
샤넬은 패션계의 총아이자 그 시대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사업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평생 독신으로 자유연애를 즐겼다. 풍부한 감성과 총명한 두뇌를 지녔으며 독립심이 강했던 샤넬에게 있어 결혼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웃이었는지 모른다.
샤넬의 첫 번째 연인인 에티엔 발장은 당시 그녀에게 성공의 문을 열어주었으나,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이는 보이 카펠이었다. 샤넬과 엔티엔 발장은 어느 겨울날 피레네 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 후 에티엔은 끊임없이 샤넬에게 구애했지만 그녀는 에티엔을 버려두고 보이 카펠을 찾기 위해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카펠은 샤넬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엇다. 에티엔의 도움으로 성공의 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성공을 완성시켜 준 것은 카펠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샤넬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으며, 그녀가 모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후원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샤넬은 그의 도움으로 가게를 낼 수 있었으며, 상류층 인사와 더불어 예술계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카펠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일찍 떠났고, 당시 샤넬은 사고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진 샤넬은 그 때문에 커튼, 침대보 할 것 없이 집 안을 온통 검은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는 조금씩 지워졌고, 샤넬은 다시 활발한 성격으로 돌아와 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가장 먼저 카펠의 자리를 채워준 사람은 드미트리 파블로비치Dmitri Pavlovich였다. 드미트리는 러시아 황제*알렉산드로 2세의 손자이자*니콜라이 2세의 사촌으로, 샤넬을 만날 당시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고 샤넬은 서른일곱 살이었다. 어느덧 중년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으로 뭇 남성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1925년, 샤넬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작을 만났다. 당시 공작이 샤넬에게 펼친 적극적인 애정공세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매일 샤넬에게 꽃과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보냈고, 그녀를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꽃다발을 선사했다. 그러나 샤넬이 보기에 정작 공작에게 필요한 여자는 자손을 낳아 대를 이어줄 부인이지 사업가 샤넬이 아닌 듯했고, 그녀는 자신의 사업을 버리고 공작부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샤넬은 "이 세상에 공작부인은 많지만 가브리엘 샤넬은 오직 하나예요" 라는 말로 공작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후에도 공작의 애정 공세는 몇 년간 계속되었지만 결국 그는 샤넬을 포기하고 귀족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물러나자 다시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해 왔다. 그중에는 밀라노 귀족,나치 간첩,*에드워드 8세처럼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샤넬은 끝까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직 사랑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3년 동안 동거해온 애인, 폴 이라브Paul Iribe가 급사한 후 더 이상 그녀는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 샤넬에게 있어 애인은 일종의 고급 액세서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가 사랑한 것은 자신의 일이었다.
영원한 패션 리더
1930년대 후반, 프랑스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기 침체와 대량 실업 사태가 빚어져 사회가 경제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 패션쇼를 연 샤넬은 '이런 시기에 유행은 아무 의미가 없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시는 이미 폐허로 변했고, 풍요로웠던 유럽은 빈곤에 허덕였다. 얼마뒤 전쟁이 끝나긴 했지만 당시의 화려한 고급 의상을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곳은 미국뿐이었다.
1947년,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은 타이트한 속옷과 발가지 닿는 긴 치마를 유행시켰고, 이로써 샤넬의 입지는 위축되었다. 디올의 디자인은 복고풍으로 샤넬과는 다소 대조적이었다. 샤넬은 디올의 디자인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 당시 사람들은 딱딱한 제복과 단조로운 의상에 싫증이나 있었기 때문에 화려한 복고풍이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샤넬의 디자인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스타일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시 샤넬은 이미 상당한 재산을 모은 후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자존심에 큰 상처르립었다. 그러나 그녀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샤넬은 다시 재기하기 위해 더욱 고군분투했다. 1954년 2월 5일,70세가 된 샤넬은 편안하고 몸에 꼭 맞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타이트한 옷보다는 편안한 옷을 선호했기에 샤넬의 패션쇼는 사람들의 주목을 모았고, 패션쇼는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패션계의 일부에서는 그녀가 '역사책 속에나 있어야 할 사람' 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냈다. 하지만 샤넬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패션쇼를 준비했다. 그리고 다시 편안함을 기본으로 우아한 옷을 선보여 당시 미국 커리어 우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샤넬 디자인의 기본은 그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샤넬은 계속해서 기적을 재창조했고, 패션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그리고 1971년 1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행에 대한 감각은 거의 동물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사업 수완 또한 굉장히 뛰어났다. 이를테면 그녀는 패션 역사의 판도를 다시 그린 패션계의 천재였다. 샤넬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단순히 옷과 디자인을 뛰어넘어 풍격, 걸음걸이, 라이프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nel
*1883년 8월 20일 프랑스에서 출생.
*1901년 패션계 입문.
*1920년 스타일리스트로 변신.
*1920년~1970년대 확고부동한 전 세계 패션계의 리더가 됨.
*1971년 1월 10일 향년 88세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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