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여후呂后

일기님 2010. 1. 11. 13:01

잔혹하고 흉악한 여장부

여후呂后

 

 

 

 ㅡ 사람들은 '여후'라는 이름에서 잔인함과 권모술수를 연상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녀는 공포 정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여후를 평가하고 있다.「여제 통치 이후 천하는 평온을 되찾았다.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줄어들어 형벌에 처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나날이 윤택해져 갔다.

 

고대 중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여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관습의 벽은 한고조의 황후인 여치에 의해 무너졌다. 여치는 중국 여성 역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주인공이다. 그녀는 중국이 전란의 잿더미로 뒤덮인 시대에 태어나 남자 못지않은 대담성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황제의 옥좌 곁으로 다가갔다.

  여후는 그녀의 아들 유영이 황제에 즉위한 후 *섭정 황후가 되었고, 조정을 여씨 천하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다. 여후는 중국 천하의 모든 신하와 백성을 그녀 앞에 무릎 끓게 만든 최초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여후가 *유방의 죽음을 기회 삼아 완권을 찬탈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한신, 팽월과 같은 공신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권력을 독점한 점은 훗날 역사가들의 거센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그녀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필연적인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후는 유방과 자신이 함께 세운 한나라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직을 보호하고 아들이자 황제인 유영을 지키기 위해 섭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 만으로 여후의 수많은 악행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다만 조금 더 공정한 시각으로 여후의 공적과 과실을 가려보고자 할 따름이다.<<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은 거시적이고 공정한 관점에서 여치를 평가했다.

  시간이 흘러 여후는 이미 먼 역사 속에 희미해졌다. 역사가 반드시 진실인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여후의 시비를 따지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어쩌면 남편의 사랑을 잃은 고독하고 가련한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까지 그녀의 매서운 눈매를 잊을 수는 없다.

 

황제가 되기까지

 

 여치는 진나라 때 *단부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여공의 원한 관계에 얽혀 패현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자랐다.

  당시 중국 사회는 격변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여공이 유방劉邦에게 딸 여치에게 시집보낸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당시 유방은 보잘것없는 한량이었지만 여공은 그가 장차 큰일을 해낼 인물임을 미리 알아보았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진나라의 국운이 다하면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유방은 이 혼란을 틈타 무리를 모아 *패공으로 추대 받았다. 이후 유방은 승승장구하며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한 후 한 나라를 세웠다. 곧이어 일어난 초한 전쟁에서 유방의 부인 여치가 *항우項羽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항우는 여치를 전쟁터로 끌고 나가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여치를 삶아 죽이겠다" 며 위협을 가했다. 여치는 4년간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수모를 겪었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훗날 여치가 보여준 악랄함과 음험함은 당시 겪은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얼마 뒤 초나라와 한나라는 전쟁을 끝내기로 협정을 맺었고, 항우는 여치를 풀어주었지만 유방은 항우가 안심한 틈을 타 다시 초나라를 공격했다. 이렇게하여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통일제국 한나라의 황제가 등극하였고, 여치는 한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권력 쟁탈전 

  유방은 황제가 되기 전에도 첩들을 전쟁터에가지 데리고 나가는 호색한이었다. 그런데 이제 황제가 되었으니 마음것 후궁을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여후는 유방의 여자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권력의 이해 관계가 얽히는 것은 참지 못했다. 여후는 누구든 그녀의 자리를 넘보려 하는 자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제거했다.

  여후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은 유방의 애첩 척희 였다. 척희는 유방이 전쟁 중에 만난 여인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여의라는 아들이 있었다. 여의 는 자랄수록 성품이 아버지 유방을 쏙 빼닮았고, 그럴수록 척희에 대한 유방의 총애도 깊어졌다. 마침내 척희는 유방에게 여후와 세자 유영을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여의를 세자로 앉혀 달라고 진언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여후는 개국공신 장량에게 도움을 청했고, 장량은 평소 유방이 흠모하던 '*상산사호'를 유영의 식객으로 모셔왔다. 상산사호는 감히 모시지 못한 현자들이었다. 과연 장량의 예상대로 유방은 상산사호가 태자 유영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태자를 패위시키지 않았고 여후도 안전할 수 있었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능력보다는 한신韓信, 장량張良,소하蕭何와 같이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세 사람은 한나라 건국 이후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아 대단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권력에 욕심이 많았던 여후는 이 세 사람을 면밀히 분석했다.장량은 지모가 뛰어나지만 운둔생활을 즐기고 있으니 그다지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소하는 야심을 품을 그릇이 아니었고, 언젠가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이용해야 할 인재였기 때문에 살려두어야 했다. 하지만 온갖 권모술수에 능한 한신은 눈엣 가시였다. 여치는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은 한신이 언젠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한신은 이미 자신을 왕으로 책봉해 달라며 유방을 위협하지 않았던가. 결굴 여치는 한나라 조정을 위해 한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방의 생각도 같았고, 두 사람은 은밀히 한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했다.

  우선 한신의 신분을 회음후로 격하시켰고, 결국 모든 지위를 박탈한 후 평민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그러나 유방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어 계획대로 실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유방이 한시과의 약속 때문에 차마 한신을 죽이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자 여후가 나섰다. 그녀는 한신을 잡아다 천으로 칭칭 감아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든 후 창으로 찔러 죽였다 한신인지 모르고 죽였다고 발뺌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한신이 살해 당하자 나머지 개국공신과 조정대신들은 여후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반면 여후는 이 기세를 몰아 위협적인 인물들을 모두 제거했다.

  여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편까지도 희생양으로 삼았다.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태자 유영에게 진압을 명하려 했다. 그러나 여후는 강력한 반대로 태자가 출정하지 못하고 사태가 위급해지자 유방은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결국 유방은 이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천하를 훔친 대도

 

  유방이 죽은 후 여후는 본격적으로 실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척희 부인과 여의를 제거했고. 나이 어린 황제 유영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결국 유영은 재위 7년 동안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이후 유공과 유홍이 즉위 했지만 실권은 여전히 여후에게 있었다.

  여후는 유 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유방의 유지를 무시하고 조정을 자기 사람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종친 유 씨를 몰아낸 자리에 여태. 여산,여록 등 자기 집안 사람들을 데려다 앉혀 놓았고,황실 원로들을 실무에서 배제시켰다. 이렇듯 여 씨 천하는 여후가 죽기 전까지 8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여후는 큰 야망만큼 뛰어난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힘으로 한나라 건국에도 큰 몫을 담당했고, 국정을  운영하면서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불합리한 법규를 철폐했다. 일례로'*삼족 죄'와 '*요언령'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사기史記>>와<<한서漢書>> 등 사서에 실린 '여제 통치 이후 천하는 평온을 되찾았다.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줄어들어 형벌에 처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나날이 윤택해져 갔다.' 라는 내용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황실의 위협 요소를 밀 제거한 덕분에 조정과 사회가 안정돨 수 있었다는 것도 여후의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여후呂后

*기원전 241년 출생,본명은 여치다.

*기원전 206년 초한 전쟁이 유방의 승리로 끝난 후, 여치는

유방의 황후로, 그녀의 아들 유영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기원전 194년 유방이 죽고 태자 유영이 즉위한 후,여후는 태후가 되었다.

*기원전 187년 유영이 죽고 전권을 휘둘렀다.

*기원전 180년 병으로 사망하자 여씨가문은 멸족을 당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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