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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일기님 2009. 9. 11. 10:10

  자연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고독에 잠기고 싶으면 사회에서 멀리 떨어지듯 자기 침실에서도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내 곁에 아무도 없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외로움에 젖어들고 싶으면  밤하늘을 수 놓은 별자리들을 바라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은 늘 접하고 있는 사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면 천체를 둘러사고 있는 대기는 우리에게 유구하고 아름다움을 안겨 주기 위해 투명하게 만들어 졌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밤거리에 서서 쳐다본 별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만일 별이 천년 마다 하룻밤에만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별을 우러러보며 수많은 세대에 걸쳐 모습을 드러내는 신의 도시인 밤을 새롭게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밤이면 밤마다 별이라는 사절들이 나타나서 타이르는 듯한 미소로 우주를 환하게 비춰 주고 있다.

  별들은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그 대문에 더욱 경건하게 보인다. 모든 자연물은 사람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감명을 느끼고자 할 때만, 바라는 감명을 전해 준다. 가장 현명한 사람조차 자연의 깊은 비밀을 빼앗을 수 없고, 자연의 완벽함을 캐낸다 하더라도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들이 어렸던 시절에 천진난만한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던 꽃과 짐승, 그리고 산은 원숙한 나이가 되어도 지혜를 전해 준다. 이처럼 자연은 사람의 장난감이 된 적이 별로 없고 자신의 존재를 천박하게 강요 하지도 않는다.

  자연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의 심중에는 명확하면서도 시적인 느낌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물이 배푸는 감명이 다양하고도 완벽하다는 뜻이다.마치 막대기로 자른 나무꾼의 지팡이와 시인의 나무가 구별되는 것과 같다.

  오늘 아침에 20채 30채쯤 되는 농가로 이루어진 풍경을 보았을 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밀러는 이쪽 밭을 소유하고 , 로크는 저쪽 밭의 주인이며, 맨닝은 저 넘어에 있는 숲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풍경을 소유 하지 못한다. 지평선 내의 모든 것을 합쳐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시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 재산을 소유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그들의 토지 문서에는 이 재산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적혀 있지 않다. 시인의 재산이야말로 농지 중에서 가장 좋으은 땅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어른 중에도 자연을 볼 줄아는 사람은 아주 작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을 보지 않고, 기껏 해야 힐끗 바라 볼 뿐이다. 태양은 어른들의 눈을 밝혀 주지만, 어린이의 경우에는 눈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 환하게 비쳐 들어간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내외적인 감각을 서로 조화시킬 수 있으며 성년기에 접어들어도 어릴 때의 천진난만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이런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과의 영적 소통이 매일 먹는 음식처럼 일상홛되어 아무리 현실이 슬프더라도 자연앞에 서면 온통 즐거움으로 휩싸이게 된다.

  자연은 말한다. "그대는 나의 창조물이다. 고로 아무리 부당한 슬픔이 그대에게 닥칠지라도 나와 함께 있으면 즐거우리라." 햇살을 뿌리는 여름 태양만이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시간이면 시간마다. 계절이면 계절마다 자연은 즐거움을 인간에게 바친다. 자연이라는 배경을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똑같이 어울려 준다. 왜냐하면 미동이 없는 대낮부터 지겹기만한 한 밤중까지 변하는 모든 시간 속의 자연은 우리들의 갖가지 감정에 감응 하면서 그 상태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공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영육을 튼튼하게 해 준다. 날이 흐린 어느 황혼 무렵,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공유지를 건넌 적이 있었다. 이때무슨 행운이 찾아오겠는냐고 남달리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둘도 없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너무 기뻐서 거의 두려울 정도 였다.

  숲속에서 청춘은 영원하다. 숲에 들어서면 사람은 뱀이 허물을 벗듯이 나이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어린애로 되돌아 간다. 숲이라는 신의 장원에는 언제나 예의와 신성이 군림하므로 이성과 신앙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숲에서는 영원한 축제가 베풀어지기 때문에 이곳으로 찾아든 손님은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거기서는 평생에 일어날 수 있는 치욕이든 재난이든, 아니면 무엇이든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치료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느낀다. 황량한 맨 땅에 서면, 머리는 상쾌한 미풍에 씻기고 맑아져서 무한한 공간으로 둥실 떠오르는 듯 하다. 더불어 모든 천박한 이기심도 살아지고 만다.

  나는 투명한 안구가 된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우주를 다스리는 존재자의 흐름이 내몸에서 흐르기 시작하면 나는 신의 한 조각이면서 중요한 부분이 된다. 가장가까운 친구의 이름도 이때만큼은 아무 상관이 없는 바람소리처럼 들린다. 형제지간이니, 일가친척이니, 주인이나 하인간이니 하는 것도 시시하고 귀찮게 느껴진다. 순수하고 아름다움을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황야는 거리나 마을보다 더 다정하고 친숙한 어떤 혈연관계가 발견되는 장소가 된다,

  정적이 감도는 풍경 속에서, 특히 지평선이 아득하게 펼쳐진 풍경에서, 사람은 자신의 천성과 비슷한 그 무엇을 볼 수 있다.

  들과 숲이 베푸는 가장 큰 즐거움은 인간과 식물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사이한 암시를 푸는 것이다. 나는 외롭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 나도 그들에게 답례를 한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마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게 보인다.불시에 놀라게 하는 모양도 전혀 예상 못한 바가 아니다. 그때의 기분은 내가 옳게 생각하거나 잘했다고 판단할 때보다 더 차원 높은 정감과 비슷하다.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힘은 자연속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인간이나 혹은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분명하다. 자연에서 얻는 기쁨은 남다른 자제력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언제나 축제의 차림으로  치장하지 않는 까닭이다. 흥겨운 잔치를 위해 향기와 찬연한 빛을 던지는 풍경도 어느 날에는 우수로 뒤덮이게 마련이다.

  자연은 언제나 정신이라는 빛깔을 띤 옷차림을 한다. 천재 지변에 허덕이는 사람은 자기 집의 화롯불을 슬프게 본다. 그런가 하면, 다정한 친구와 사별한 사람은 주변 풍경을 보면서 일종의 비애를 느끼기도 한다.

  광대한 하늘도 가치가 낮은 자들의 머리 위를 덮고 있을 때는 평소보다 작고 하찮아 지는 법이다.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

*1803년~1882년

*청교도주의 및 독일 이상주의를 고취하여 미국의 사상계에 영향을 끼쳤다.

*저서:<<자연론>> <<에세이집>> <<위인론>> 따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