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명수필

필립 들레름PhiliPPe Delerm

일기님 2009. 8. 29. 00:09

 

움직이지 않는 정원

 


  

                                                              작가: 필립 들레름PhiliPPe Delerm

 

 

  여름에 아키타니아 지방(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지방)에 있는 한 정원을 거닐어 본다. 8월의 움푹한 손바닥 안, 오후가 막 시작되고 있다. 바람한 점 불지 않는다. 빨간 토마토 열매들은 태양의 붉은 반점들로 반짝인다. 지난번 내린 비 때문에 토마토 열매에 흙이 조금 묻어 있다. 차가운 물에 씻은 토마토의 아직 따듯한 과육을 맛보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다. 꼼짝도 않고 머물러 있는 시간에, 색깔들의 편차를 찬찬히 음미 해본다. 토마토는 아직 연두색이다. 꼭지 부분은 좀 더 진한 초록색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신맛이 도는 엷은 오렌지 빛깔이다. 오렌지색 토마토들은 가지가 휘어지게 만들 것 같지 않다. 잘 익은 토마토들 만이 관능적으로 가지 끝에 무겁게 매달려 있다.

  

  누가 나무 걸상 하나를 접붙인 자두나무에 기대 놓았다. 야채밭 주변에 나있는 작은 오솔길에 과일 몇 개가 떨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자두는 붉은 보랏빛을 띤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어두운 푸른색과 분홍색이 서로 뽐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몇 개의 설탕 알갱이가 연약한 껍질에 박혀있다. 땅에 떨어진 열매는 벌어져 있고, 축축한 흙 때문에 갈색으로 변한 과육에서 즙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아직 다 익지 않은 자두들은 초록빛이도는 다 갈색 바탕에 붉은 빛이 점점이 박혀있다. 아직 익지 않은 막내 자두들은 먼저 익은 형들의 푸르스름한 색깔에 매혹 당하면서도 그 색깔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늘에 남아 있고 싶어 한다.햇살은 냉혹하면서도 부드럽게 나뭇가지들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햇빛이 야채밭 전채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게으른 상추도, 땅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근대도 금빛이다. 홍당무 잎사귀만이 날카로운 초록색으로 햇빛에 맞설 뿐이다. 날씬한 잎사귀가 마치 무기력한 체념으로부터 홍당무들을 보호라도 해 주고 있다는 듯이, 야채밭 끝에 둘러쳐진 생울타리에 기대어 자라고 있는 산딸기들에게 8월은 너무 늦은 철이다. 산딸기는 이미 루비나 석류빛 벨벳처럼 반지르르하지 않다. 이미 갈색으로 말라붙어서 쪼글쪼글해진 찌꺼기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쪽에는 작은 돌담을 따라 접붙인 배나무가 늘어져 있다. 이제 곧 익게 될 배를 매단 나뭇가지 들이 좌우 대칭으로 팔을 벌린 채, 적갈색 모래처럼 얼룩덜룩한 색을 띤, 길쭉하고 윤기 없는 여성적인 모양의 배, 그러나 무엇보다. 새콤하고 씻은 듯이 갈증을 해소해 주는 신선함은 바로 그 옆에서 자라고 있는 뮈스카트 포도나무 뿌리 근처에 솟아오른다. 포도송이는 엷은 금색과 녹색 즙 혹은 불투명함과 투명함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일까? 포도송이 들은 빛을 잔뜩 머금고 있다. 어떤 포도송이들은 물기와 먼지로 이루어진 막에 조심스럽게 쌓여 있다. 벌써 연보랏빛을 띤 포도송이들도 눈에 띤다. 연보라색 포도들은 8월의 태양을 덥석 물고 있는 초록색 포도송이들의 치기어린 유혹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덥다. 자두나무, 살구나무, 버찌나무가 나뭇가지 아래 놓인, 사용하지 않는 탁구 테이블 위에 그늘을 드리워 준다. 에메랄드색 칠이 비늘처럼 일어난 탁구 테이블 위에 빨간 자두 몇 개가 떨어져 있다. 덥다. 이 정원 어딘가 가장 깊은 8월의 품안, 물에 대한 생각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길다란 대나무 지주대 둘레에 엷은 색깔의 물주는 고무호스가 감겨있다. 불규칙한 곡선을 이룬 채, 낡은 호스의 이음 부분을 절연 테이프와 철사줄로 칭칭 동여맨 모양이 왠지 친근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스프링클러가 힘차게 뿜어내는 시원한 물과는 다르다. 저녁 무렵, 이 호스를 통해 부드러운 물, 지혜로운 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을 만큼 딱 충분한 양의 물이.

  그러나 지금은 태양의 시간이다. 모든 황금빛 ,초록빛, 장밋빛 꽃 위에 머무는 부동의 시간, 지금은 모두 색채를 빨아들이는 시간이며, 꼼짝 못하게 붙잡아 두는 시간이다.

 

 필립 들레름 PhiliPPe Delerm

 

*1950년 프랑스, 작은마을 초등학교 부부교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낭테르대학에서 문학공부를 하였고

*1975년부터 지금까지 노르망디 지방의 문학교사로 재직

수필 대표작: 새벽 거리에서 먹는 크루아상 .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칼 . 일요일 아침의 파이 상자 . 완두콩 깍지 까는 일 돕기 . 포츠토 한잔 마시기 . 사과 냄새 . 자전거 발전기 소리 . 훈김 쐬기 . 잘하면 정원에서 밥 먹어도 될 것 같은데 . 오디 따기 11. 첫 맥주 한 모금 . 기념품 유리 구슬 . 옛날 기차를 타고 . 투르 드 프랑스 . 바나나 스플릿 이하 생략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다.

* 작가의 관찰력은 통상적인 것이라 말 할 수 있겠지만 들레름의 수필을 통해 알아가는 그의 정신 세계는 무한의 극에 다다른다. 거의 모든 작품이 대표작이라 할 만큼 글 내용이 맛 깔 스럽다. 이 작품을 인연으로 그의 문학세계를 여행해보는 것도 괜잖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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