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사포Sappho

일기님 2009. 8. 27. 01:35

그리스의 10대 뮤즈 

사포 Sappho


 

 

ㅡ 여류시인 사포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는 과연 미녀였을까. 추녀였을까 ? 당시 사포는 위대한 시인이었을까. 풍속을 해치는 저속한 부류였을까? 그녀는 정말로 동성연애자 였을까?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플라톤은 사포를 ‘그리스의 10대 뮤즈’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서양 문화사에서는 호메로스에 필적하는 여성 시인으로 사포를 꼽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베게 밑에 사포의 시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20세기 현대 시인 파운드는 런던의 한 찻집에서 사포의 시집을 읽고 연감을 얻어 ‘이미지즘’ 이라 불리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어 냈다. 반면 중세 사람들은  ‘동성애’의 이유만으로 그녀의 시집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과연 사포의 진실은 무엇일까? 신비의 베일에 둘러싸여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그녀,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사포의 삶을 지금부터 파헤쳐 본다.

  사포의 시집은 총 아홉 권이었으며, 한 권당 1.320행 정도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시집은 완전하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접할 수 있는 사포의 시와 일화는 기원전 5세기경에 제작된“파피루스나,” “보카치오가 쓴<<열녀전>>등 극히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박물관에 보관된 벽화나 ”오비디우스,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속에서 사포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지만, 현재 그녀에 관한 자료 가운데 믿을 만 한 것은 거의 없다. 중세를 거치면서 사포의 시집과 그녀의 자료가 대부분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사포의 감성적인 시가 당시의 기독교 관습에 위배 된다 하여 그녀의 시집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녀의 삶을 더 신비롭게 위장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 19세기 말 페미니즘이 등장하면서 사포는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동성연애자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동성애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은 사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사포가 추녀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나오면서 그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모든 논란을 접어두고 시인 사포가 새로운 유파를 형성하고 후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분명히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기존의 정형화된 시

운율을 과감히 파괴한 것, 찬미의 대상을 신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 시킨 것, 당시로서는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던 1인칭 관점을 사용했다는 점은 문학사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도였다. 사포의 삶은 오랜 역사 속에 묻혀 버렸지만 그녀가 남긴 문학적 업적은 영원히 빛나는 역사의 기록이 될 것이다.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삶


 

  사포의 삶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가장먼저 출생 및 사망 시기가 그렇다. 그녀의 출생 시기를 두고 기원전 612년 혹은 기원전 543년으로 보는 설 등 갖가지 추축이 난무 하지만 정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으로부터 2천6백여년 전인 기원전 6세기 무렵에 태어났다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상으로 볼 때 사포는 인류 최초의 여류 시인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녀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여류 시인 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포는 “레스보스 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참주의 박해로 온 가족이 시칠리아 섬으로 이주 했다. 성인이 된 사포는 안드로스 섬에 사는 케로킬라스라는 부유한 상인과 결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사포는 남편이 남겨준 재산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창작에만 몰두했다. 사포는 곧 문학적 재능을 나타냈고 ,스무 살 때 이미 유명한 여류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포의 외모에 대하여 지금껏 두 가지의 다른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녀가 절세미인이었다는 주장과 추녀였다는 주장이다. 절세미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법정에 출두했던 일화를 근거로 제시한다. 판사가 법정에선 사포에게 사형을 언도하려 하자 방청석의 군중들이 “아름다운 사포를 절대 죽일 수 없다”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판사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석방했다는 내용이다. 반면 사포가 미인은커녕 아주 못생기고 남자 같은 여자였다고 주장 하는 사람도 있다. 사포를 둘러싼 의문 중 가장 의견이 분분한 것은 그녀가 과연 동성애자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당시 레스보스 상류층 여성들은 사교 모임이나 전문적으로 시를 배우는 모임 등에서 자유롭게 시를 읊을 수 있었다. 사포는 이런 모임의 중심인물이었다. 사포의 명성이 멀리 퍼지자 그녀에게 딸을 보내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포는 ‘여성문예 클럽’ 을 만들어 시와 음악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수많은 수작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사랑과 욕망에 대하여 노래했는데, ‘레즈비언’ 이라는 단어도 사포에게서 유래되었다. 이 때문에 사포는 최초의 동성애자라는 오명을 쓴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포를 둘러싼 의문이다. 대략 두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그녀가 딸에게 유작시를 남기고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파온에게 시련을 당한 상처로 인해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사포의 일생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온갖 추측과 낭설로 가득하다.

 

동성애와 이성애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가르침에 대한 보답이라는 형태를 가장하여 동성애가 빈번하게 이루어 졌다. 사포와 그 제자들의 시에도 동성애적 색채가 짙게 나타나 있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동성애가 인정받았다. 그중에서도 염세주의 성향이 강했던 그리스인들은 동성애를 이성애의 대체 혹은 보완적인 것으로 여겼다. 사포가 제자들을 아끼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처받기 쉽고 배타적인 이성보다 동성간에 서로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사포와 제자들은 일상생활은 물론 예술적 감성이나 신앙생활에서도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사포는 이성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까? 이 문제에서는 쉽게 단언 할 수 없다. 사포가 결혼을 통해 물질적 풍요와 안정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그녀의 문학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포에게 있어 사랑과 결혼은 전혀 별게였다. 그녀는 알카이오스 ,“아크레온 ”아이스킬로스를 비롯한 많은 남성들과 숱한 로맨스를 일으켰고, 그중 파온이라는 남자를 특히 사랑했다고 했다. 훗날 고대 로마의 시인 나소 오비디우스는 사포와 파온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작품<<사포가 파온에게 보내는 글>>을 남겼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바다에 뛰어들면 불행한 사랑을 끝맺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포는 죽어서까지 파온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파온에 대한 사포의 사랑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와 제자들의 사이는 동성애라기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다른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혼이 깃든 아름다운 노래


  장미 잎사귀/ 사포



장미 잎사귀 노랗게 시들어
분수 물에 파르르 떨어질 때
고요히 들리는 갈피리 소리
서글픈 마음을 더해준다

자갈 소리 내 귀에 들리기를
안타까이 안타까이 기다리는
아아, 설레는 이 마음이여!
그건 파온(사포가 사랑했던 남자) 의 발자취 아닌가.

 

 

  영혼이 깃든 사포의 아름다운 시는 훗날 시문학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사포는 서양 문학사에서 여성 문학의 선구자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포는 하프를 연주하며 사랑을 노래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 뛰어난 기교와 품격을 갖춘 사포의 시는 이후 서정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특히 그녀가 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1인칭 서술 기법은 이후 고대 시창작의 전형이 되었다.

  사포가 살던 시대는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였다. 모든 분야의 문화 예술이 크게 꽃을 피웠고 사포를 중심으로 한 여성 문학도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사포의 인기는 대단 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스보스 섬 화폐에는 그녀의 두상이 새겨져 있었고, 시칠리아 섬 사람들 에게는 그녀의 초상화가 매우 인기였으며, 아테네의 통치자 솔론은 사포로부터 시를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포의 작품은 대부분 구전되다가 사라졌고, 기원전 3세기 무렵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도 많이 훼손되어 있다. 알렉산더 대왕 시기에 사포의 서정시를 총 아홉 권의 시집으로 편찬했으나, 380년 로마 기독교인들은 그녀의 시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시집을 불태워 버렸다. 이때 화를 면하고 남아 있던 시집은 1073년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이유로 또다시 불 태워졌다.

  사포의 시는 이렇듯 몇 차례 시련을 겪으며 거의 사라졌고,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인용된 것들이다. 훗날 고고학자들이 고대 유물에서 사포의 시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온전히 보존된 것은 없고 10행 미만의 시가 몇 편 발견 되었을 뿐이다. 사포가 문학사에 끼친 영향이나 당시의 인기에 비해 현재 그녀의 명성은 너무나 초라하다. 그러나 이렇게 사포의 삶과 시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녀를 뮤즈의 여신으로 모시는지도 모른다.

  

사포Sappho :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스무살때 부터 여류 시인으로 유명해졌다.

*기원전 5세기경 여러가지 불행한 생활을 비관 자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으로는 장시(長詩)아프로디테 송가(頌歌) 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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