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여자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일기님 2010. 4. 10. 09:59

순수함을 간직한 현대 무용의 시조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ㅡ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의 무대에서 하늘거리는 무용복을 입고  맨발로 춤을 추며 세상을 놀라게한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서양 무용계를 주도해온 발레와 전혀 다른 춤으로 혁명을 일으킨 그녀는 춤 실력뿐 아니라 복잡한 연애사로도 유명하다. 항상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그녀 주변에는 늘 새로운 연인이 끊이지 않았다.

 

  무용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던 이사도라 던컨은 그에 못지않은 화려한 연애 경력으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그녀의 화려한 연애사가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가 기질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사랑과 예술을 결합하여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낸 그녀가 항상 사랑을 갈구하며 많은 남자를 만났다고 해서 방탕한 여자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무용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사도라는 여성 인권 해방을 소리 높여 외친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녀의 사랑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새로운 창작을 위한 밑거름이었고,생명이었다. 조각가 로뎅,러시아의 청년 시인 에세닌과의 사랑을 통해 그녀는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사랑에 대한 그녀의 끊임없는 갈구는 어쩌면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사도라와 에세닌Esenin과의 사랑은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했고,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국적도 다르고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상대와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누구 보다도 뜨겁게 서로를 사랑했다. 당시 이사도라는 에세닌과 이별한 후에도 가는 곳마다 립스틱으로 '에세닌은 작은 천사'라는 메모를 습관처럼 남기고 다녔다고 한다. 평생 숭고한 사랑과 예술을 위해 살았던 이사도라는 자신의 직감을 믿는 신념이 강한 여성이었고, 사랑은 진실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길에는 숱한 불행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대를 평정하다

 

 

  이사도라 던컨은 무용 하나로 부다페스트, 비엔나, 뭰헨, 피렌체, 베를린,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외면했던 미국도 마침내 그녀를 인정했다. 이사도라에게 있어 무용은 단순한히 좋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무용은 그녀의 영혼을 표출하는 작없이자 살아 숨 쉬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로댕은 "그녀는 조각가가 힘들게 표현해야 하는 그 무언가를 아주 쉽게 자신의 몸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춤과 혼연 일체가 되어 감동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 한 바 있다. 어는 기자는 이사도라를 "그녀는 용맹스러운 여전사 이고, 아메리카 스타일의 상징이며,여성해방 운동의 지도자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5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활발하고 용감한 아이였는데,어린 시절 물결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매일 밤 그녀에게 셰익스피어,실러,베이컨, 키츠의 작품을 읽어주었으며 베토벤, 모짜르트,슈만, 쇼팽의 곡을 들려주었다. 이 경험은 훗날 그녀가 풍부한 감성과 예술적 소양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그녀는 형제들과 춤, 시낭송, 연극 공연을 선보였는데, 모두들 이사도라의 재능에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사도라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일리노이 주 시카코에서 열리는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녀는 새하얀 *튜닉을 입고 춤을 추었으나 심사 위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들은 이사도라에게 "춤에 소질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무대에 올리기에 적합한 춤은 아니다."라고 평했다. 그 후 이사도라는 생활고를 겪다가 어쩔 수 없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관능적인 춤을 추었고, 매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을 거둔 바로 그 순간, 이사도라는 '앞으로 절대 대중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꺽지 않겠다고 '고 다짐했다.

 

성공을 향해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사도라는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엔젠가 이사도라는 미국의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네빈Nevin이 쓴 곡,<오필리아>와 <나르시스>에 맞추어 안무를 짰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네빈은 곧바로 이사도라를 찾아와 버럭 화를 냈다.

  "내 음악은 춤을 추기 위한 것이 아니요. 누구든지 내 음악을 가지고 춤을 추는 일은 절대 허락할 수 없소."

  그러나 이사도라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네빈에게 한 번만 자신의 춤을 봐달라고 부탁하며, " 만약 당신이 내 춤을 보고도 같은 생각이라면 앞으로 절대 당신의 음악을 사용하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다.그리고 잠시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네빈은 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서 벌덕 일어나 감격스러운 듯 이사도라를 껴안으며 "당신은 천사요. "라고 말했다. 그녀가 다시 <오필리아>에 맞추어 춤을 추자 네빈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사도라의 춤이 끝나자 네빈은 그 자리에서 떠오른<봄날>이라는 곡을 연주했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합동 공연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공연은 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에도 항상 성왕을 이루었다. 뉴욕은 온통 두 사람의 공연으로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특히 사교계 여성들은 경쟁적으로 '모시기에 나섰다.그러나 이사도라는 진정으로 자신의 춤을 이해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단순한 눈요기로 보는 관객이 아닌 자신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관객이 필요했다.

  결국 이사도라는 유욕의 영광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였다. 런던에 도착한 이사도라는 초반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패트릭 캠벨Patrick Campbell 부인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캠벨 부인의 주선으로 열린 런던 사교계 인사들을 위한 공연에서 에드워드 국왕의 찬사를 받았다. 이후 그녀는 런던의 문학가, 예술가들과 친분을 넓혀갔고,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렸다. 하지만 이사도라의 춤이 예술계로부터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사도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그리고 여기에서 위대한 조각가 로댕을 만나게 된다. 로댕은 이사도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이사도라는 로댕의 열정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 후 이사도라는 로댕,화가 외젠 까리에르Eugene Carriere와 친분을 쌓는 중에 좀 더 전문적으로 무용을 연구하여 자연과 인간의 혼을 담을 수 있는 춤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파리에서 개선문의 부조, 루브르궁의 예술품, 로댕 예술관에 잇는 걸작을 비롯하여 카르나발레 박물관, 루브르박물관의 진귀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 때부터 이사도라는 도서관에 파묻혀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용에 관한 모든 서적을 탐독했다. 그녀는 춤의 정수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세상의 모든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했다. 하루 종일 연습실에 틀어밖혀 춤의 정수에 대해 고민하던 그녀가 발견한 춤의 정수는 바로 ' 사람의 마음' 이었다. 이 순간 이사도라는 현대무용가의 기초 이론을 탄생 시켰다.

 

대성공

 

 

  이사도라는 파리의 유명한 살로에서 초청 공연을 하고는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춤에 열광하는 팬이 늘어났고, 사람들은 "이상과 예술에 대한 모든 열정을 일깨운다" 며 그녀의 춤을 극찬했다.

  그즈음 이사도라는 색다른 안무로 유럽 예술계를 흔들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대극장에서 그녀는 파란 무대를 배경으로 새하얀 튜닉을 걸치고 춤을 추었다. 30일간의 장기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극장은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불가리아에서도 관객들은 뜨거운 갈채를 보내주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춤이 끝나자 모자와 꽃다발을 무대로 던지며 "최고야, 최고!" 라고 외쳐댔다. 이사도라는 계속해서 뮌헨, 비엔나, 프로방스,베를린을 돌며 공연을 이어갔다.

  그중 뮌헨 관객의 반응은 특히 열광적이었다. 이사도라의 공연이 끝나자 학생들은 말 대신 그녀의 마차를 끌고 행진했다. 그리고 그녀의 숙소 앞에서 발코니를 향해 "위대하고 성스러운 이사도라!" 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이사도라가 일일이 손수건과 꽃을 나눠주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마치 봄날의 나비가 춤을 추듯 사뿐사뿐 움직이며 관객들에게 사랑과 열정, 행복을 선사했다.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앙코르를 외치며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이렇게 베를린을 사로잡은 이사도라는 다시 '비엔나 정복'에 나섰다. 이사도라의 춤은 전통 무용인 발레와 전혀 다른 새로운 춤이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 유럽의 무용계는 오로지 발레를 으뜸으로 여겼다.  특히 러시아는 발레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곳에서조차 이사도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심지어 극장 밖에서 이사도라를 막아 세우고 " 다시 한번 춤을 보여달라" 고 외치는 학생도 있었다. 이렇듯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모으던 이사도라였지만 고국인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는데, 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녀의 춤을 격찬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1927년, 이사도라는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아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평생 춤에 대한 열정으로 창작열을 불태운 그녀는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꿈꾸었고, 그것을 춤으로 표현했다. 어떤 시련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켜온 정신,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녀를 가장 빛나게 하는 보석이 아닐까?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7년 5월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7월 러시아 진출

*1922년 5월 러시아 시인 에세닌과 결혼하였음

*1927년 9월 14일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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